들로
산으로
하늘로
가을이 오고 있다. 두꺼운 책 속의 이야기처럼 신비하게.

남들은 나이를 먹으니 가을이 싫어지더라 하는데 나는 왜 아직도 가을이 좋은 것일까. 그 품에 들어가 머물고 싶고 그 곁에 멈추어 기대보고 싶은 것도 가을이고 물드는 나뭇잎 하나 시드는 풀잎 하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 것도 가을이다.

가을은 만물이 경건해지는 계절이다. 그것이 풀이라도 어찌 시들며 희희낙락할 수 있겠는가. 외진 산기슭 혹은 들녘에서 억세게 자라던 억새풀도 흰 꽃의 백기를 들고, 악을 쓰며 울어대던 밤나무 숲의 매미들도 목소리를 낮추면서 가을은 그렇게 겸손과 온유의 현장으로 바뀌어 간다. 그런 의미에서 가을은 다분히 종교적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던 하늘, 누어서 밤하늘을 바라보면 북두칠성이 코끝에 있는 듯 가깝던 하늘, 그 하늘이 범접할 수 없는 높이로 높아지고 우리의 비양심을 빠짐없이 비춰낼 듯 맑아지면 여기 저기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핀다.

이런 꽃들이나 그 위를 나는 고추잠자리 날개, 그리고 그 날개에 달려와 빛나는 가을햇살은 모두 맑기가 진리 같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 역시 그 얼굴이 맑다. 그러고 보면 가을의 첫인상은 맑음이다. 그 맑음에 어떻게 화려한 가을이 덧입혀지는를 보는 즐거움으로 사람들은 가을을 사랑한다.
도시를 떠나 조금 가면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가을이 있다.

가야 한다 가을을 보려면 도시에서 멀리 떨어 진 곳으로 가야 한다.

몇 집 안 되는 마을 뒤로는 참나무 숲이 울창하다. 보잘것없는 가랑잎이 될 것이지만 가을 한철 참나무 잎들의 단풍잔치는 부러울 것이 없다. 참나무 숲 뒤로 드문드문 서있는 낙엽송이 내뿜는 주황색 빛깔 또한 지나던 구름도 머물만하다. 이런 때면 풀잎이든 나뭇잎이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천수답 논두렁의 풀잎도 단풍이 든다. 그래서 가고 싶어진다 산골짜기를 지나 산속으로 숲속으로 만추 속으로, 저 오색의 불 속으로. 길을 잃을지도 모를 가을 깊은 신비 속으로. 방죽 물이 차가워지면서 물방개도 뭔가를 준비하는 듯 헤엄치는 속도가 빨라지면 된 서리가 내릴 듯 하늘이 흐리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바람개비를 돌리며 방죽 둑을 내달리던 아이들도 밭으로 나가 엄마가 서리거둠한 고추를 소쿠리에 담아 나르며 이제 곧 마감될 가을을 예감한다.

가을의 매력은 가을의 끝에 있다. 추수가 끝나고 각색 단풍들의 화려함이 끝물 참외처럼 쇠잔해 지면 모든 것이 쓸쓸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도 나뭇가지도 쓸쓸하다. 뜨는 해도 쓸쓸하고 지는 해는 더욱 쓸쓸하다.

빈들의 허수아비도 쓸쓸하고 그 그림자는 더욱 쓸쓸하다. 그러나 나는 이 쓸쓸함의 아름다움 때문에 가을을 좋아 한다. 그때, 제대로 된 옷한 벌 입고 다지지 못하던 때, 이 쓸쓸한 가을이 내게는 참으로 섬뜩할 만큼 싫은 것이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만큼 내가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서 본 것은 왜 쓸쓸함도 아름다움으로 남는 것일까.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빈들로 더욱 차가워진 바람이 불고 그 들을 바라보며 먼 길을 읍내까지 걸어가던 나의 모습이 있어 이 나이에도 나는 가을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제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올해는 추석연휴가 길어 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을 것 같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갈 때마다 달라지는 고향이지만 사람들은 용케도 자신의 고향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 고향이라면 이야기를 통해 얻는 즐거움은 얼마나 크겠는가. 추석은 그것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다. 그 이야기에 필요한 것은 학력도 아니고 출세도 아니다. ‘고향’ 하나면 된다. 고향의 부모들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에, 딸이기 때문에 자식을 반긴다.

고향은 그 어머니처럼 객지생활에 지친 모든이를 반겨주려고 있는 대지의 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가서 안기고 싶은 고향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그 이유들을 끌어안고 그리움을 삭일 것이다. 고향이든 타향이든 공평하게 찾아오는 가을은 고향보다 큰 품으로 우리 모두를 품어 준다.

이 가을의 품에 안겨 서로 다른 사정을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때로는 만산홍엽처럼 황홀하게 때로는 빈들의 허수아비처럼 진지하게 세상과 하늘을 함께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사랑 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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