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사회적 지위가 자타가 공인하는 탄탄 대로에 거기다가 애처가로 소문난 위인이요. 자녀들은 모두가 소위 명문대학을 거쳐 모두 곧게 장성했으며, 가산은 남 부러워할만큼이나 넉넉한 편인데도 좀처럼 마음의 평화를 되찾지 못해 유한(有寒)이 유환(有患)으로 변질된 꼴이 되고 말았다.
남들에게 내색은 안하지만. 그러던 어느날, 나이 50 중반에 접어든 가정부를 새로 들였는데, 그 가정부는 첫날부터 매우 부지런하였다. 매사에 깔끔하고 알뜰한데다가 요리솜씨가 뛰어났으며, 집안 청소는 물론 빨래에 이르기까지 척척, 도무지 고된 표정이라고는 없이 젊은이들이 휘파람 불어가며 하듯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이였다.
시일이 갈수록 가정부의 솜씨는 기름끼 흐르듯 했으며 표정은 더욱 밝았다. 부인은 가정부의 동정을 유심히 관찰했으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생겼다. ‘나이 50 중반에 남편도 자식도 없는 몸으로 무슨 낙이라고 항상 웃는 얼굴일까? 한달 보수라 했자 유별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남의 살림을 마치 자기 살림 꾸려가듯 한단 말인가?’
어찌 그 뿐이랴. 그 작은 보수를 쪼개어 가난한 이들을 돕기까지 하니 이상스러웠다. 혹시 위장취업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리하여 부인은 의심을 풀기 위해서 급기야 가정부의 뒤를 밟았다. 비로소 알게 된 것이 가정부가 아주 독실한 카톨릭신자라는 사실이었다.
부인의 수수께끼는 쉽게 풀렸다. 그제서야 남을 의심하며 상을 찌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이 불쌍함을 깨닫고는 자청해서 가정부의 인도를 받았다.
부인의 생활엔 금시 환한 변화가 생겼다. 새삼 둘레를 살피니 모두가 자기에겐 거울이요, 스승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언제나 낮은 데로 임하시는 주님을 볼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작은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부인이 즐겨 부르는 성가의 한 구절이다.
영생을 기구한다는 것은 진흙탕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참된 자세이어야 한다. 찰나적으로 지나가는 세월을 그나마 주체성 없이 나그네처럼 살다 보면 종국엔 불안감으로 하여 부질없이 갖는 욕심만 부리게 되고, 더 많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엉뚱한 집념으로 변해 마음이 무거워져 점점 웃을 날이 없어진다.
남으로부터 희생과 정성이 가득 담긴 걸 바라면서 자기는 고작 지꺼기나 뱉은다면 그를 좋아하며 가까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래지 않아 고독에 몸부림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가 그것이다. 지난 날 유한양행의 유일한 사장이 피땀으로 자수성가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던 거룩한 처사를 본 일이 있지 아니한가? 또 김활란 박사 역시 전 재산을 이화여대 재단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러 임종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나 죽거든 장송곡일란 부르지 말고 승리의 노래를 불러 주오”라고 했음은 자신만만하게 자기의 생애를 평가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베푼다는 것은 나에게 필요치 않은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까지 내놓는 것이다.
‘웃는 얼굴’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웃는 사람’은 흔치 않다. 웃음은 마음의 평화와 직결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웃는다는 건 사실 어렵다. 나 자신 스스로 무거운 짐을 벗고 홀가분할 때 절로 웃음이 밖으로 피어나더라.
세월이 흘러 그 부인이 나에게 카톨릭 입문을 권유해 왔을 때 “나 한참 선배요”라고 대답하니, 부인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뒷 머리를 긁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천국에의 계단에 선 천진무구 그것이었다. 꿈속에서 본 천사 같았다.
나는 오늘도 마음을 가다듬으며 노욕을 터는 연습을 하고 있다. 끝이 올 때까진 끝이 아니기에 쉬지 않고 더 열심히 연습하리라.
/시인
이기진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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