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봄날 - 안산신문

「봄은 얼어붙은 땅에서 시작된다」 했던가. 계절의 봄날 뿐만 아니라 인간사 또한 지나고 보니 그러한가 싶다.

1958년 12월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마산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산일보사로부터 <세모유감>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달밤에 체조하며」라는 글을 발표했다.

원고지 10매 분량에 자유당정권말기의 권력의 극심한 안하무인적 횡포를 꼬집어 이죽거렸던 것인데 중앙의 검열에 걸려 이듬에 1월에 7년을 근속했던 마산을 뒤로 하고 전혀 낯설은 거제도로 딱지붙어 떠나야했다. 그때 내 나이 34세. 정권의 충견(忠犬)이어야 보신(保身)이 되었던 시절에 정권을 향해 짖어댔으니 억울한 건 없었지만 당장은 막막했고 부글부글 속이 끓고 불끈 쥔 주먹이 떨렸다.

초임지라 전기도 없는 곳의 지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졸지에 문명세계로부터 차단된 것이었다. 은근히 자극은 되었지만 위로도 격려도 없는 외토리 심사를 달래주는 건 갈매기의 자유로운 비상과 썰물뒤의 넉넉한 바다냄새가 고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면장의 권유로 유지들과 어울려 배를 대절해 한산섬으로 봄나들이를 갔다. 호연지기가 조금은 되살아나는듯 싶으면서 숨 가쁘게 제승당에 이르렀는데 나는 거기서 이순신 성웅의 위용과 위업 앞에 너무 보잘것 없는 내 존재를 머리숙여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더러 오만을 부렸던 내겐 뜻밖의 계기였다.

귀로에 배안에서 거침없는 진한 사투리의 담소가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막히면 돌아 흐르는 물처럼 하면 오만게 다 편한기라』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내뀌가 번쩍 열렸다. 「그렇구나 막히면 돌아 흐르는 물처럼 처산했어야 했었어」그날 내가 얻은 것은 벅차도록 많았다. 뱃머리의 물살 가르는 속도따라 주변으로 번지는 파장의 크기가 다른 것을 목도 한것도 그 하나였다.

그 며칠후 관내를 순찰하다가 허기져 그만 길섶에 주저 앉았더니 가까운 보리 밭에서 보리 익는 냄새가 솔솔 식도(食道)로 풍겨 오는 것이 아닌가.

명색이 지서장이 허기졌던 거제의 가난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낙네들이 목을 세워 장작묶움을 머리에 이고 고무신은 허리춤에 찬채 송충이 울글거리는 자갈길을 맨말로 걸어서 부둣가로 향했던 그 대열을 생각하면 지서장은 다땅히 허기져야 했었다.

백의종군한 성웅도 눈앞에서 겹치고 세월은 「박히면 돌아 흐르는 물처럼」을 되뇌이며 가는데 어느날 나는 거의 인적이 없는 골짜기에서 하나의 비석을 발견했다. 이끼 끼고 풍화하기 시작하는 글 귀가 사정없이 내 뇌리를 강타했다.

유세막사진(有勢莫使盡)

세진한상봉(勢盡恨相逢)

세력이 있다고 다 쓰지 말아라. 세력이 다하면 원한과 만나라라는 뜻이다.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나는 잔등(殘橙) 돋우고 한편의 수필 「유배지의 봄」을 탈고했다. 나의 등단작품이자 나로 하여금 본격 문학활동을 하게 한 「생의 봄날」의 신호탄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듬해 3월15일 나의 전임지인 마산에서 부정선거 항거의 봉화가 올랐고 4·19로 이어져 결국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멍석을 깔고 공공연히 「달밤에 체조」하다가 사필귀정의 된맛을 본 것이었다. 눈물 있고 기쁨 오듯 겨울 지나서 비로소 봄날은 오더라.

-이기진 안산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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