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종 안산 YMCA  이사장

정조대왕과 정약용,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주자학 유일사상과 폐쇄적인 노론 일당독재에 맞서 열린 사상으로 신(新) 사회를 지향했다. 실사구시를 표방하는 실학과 선진 과학문물 그리고 인간중심의 새로운 사상으로 침몰해 가는 조선사회를 구하려 했던 저들의 시도는 그러나 철저하게 좌절하고 오히려 저들이 멸문지화를 당하거나 멀리 죽음의 땅으로 쫓겨 감으로서 마지막 희망의 불씨는 꺼지고 그 때부터 ‘조선’은 외세의 침탈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변화를 원치 않는 견고한 기득권, 수구세력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자세는 분명히 정략적이고 정파적이고 치밀하고 끈질기며 일정부분 비열하다. 이 책은 변화를 원치 않는 기득권 세력들이 득세할 때 겪게 되는 역사적 폐해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도 이 땅에서는 그러한 퇴행적 양태가 단절되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1800년 6월, 등에 난 종기가 악화되어 개혁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난다. 정조의 죽음은 신세대가 몰락하고 구세대가 다시 살아나는 반동의 시작이었다. 개방과 다양성 그리고 실학의 문은 닫히고 다시 폐쇄와 획일 그리고 관념적인 성리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세계사의 조류와는 다르게 우리 역사는 진보를 거부하고 역사를 거슬러 침잠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정조의 시신이 땅에 묻히는 순간 나이 어린 순조를 앞세운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근거로 남인과 시파를 성리학을 부정하는 사교집단으로 몰아 숨통을 끊으려 한다. 이에 따라 젊은 실학파 학자이거나 개혁적 관료이었던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이가환, 이승훈, 최필공, 최필제, 오달현, 신대현, 최창현, 권철신, 홍교만, 강경복,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 이국승, 윤점혜, 정순매, 고광성 등등등 수많은 인재와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되고 그 여파가 그 들의 일가친척에게 까지 미친다.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다.

참담한 것은 실제로 천주교를 모르거나 알았지만 버린(背敎) 사람, 처음에 단지 호기심에 천주교 관련서적을 읽어 봤지만 그 후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까지도 노론 벽파는 반대편을 숙청하는 정략적인 수단으로 활용하여 무자비하게 죽음의 굴레를 씌운다.

처음부터 노론 벽파의 목적은 정약용, 정약전 형제를 비롯한 실학파들을 제거하는데 있었지 그들이 천주교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이 민족의 미래를 담보하느냐 담보하지 못하느냐도 결코 기준이 아니었다. 노론 벽파는 단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남인과 시파 - 대부분 젊은 실학파 학자이거나 개혁적 관료들 - 그들의 목숨을 뺏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완고한 지배 권력의 공격 속에서 좌초된 꿈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정약용이나 시대의 절망을 딛고 민중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간 정약전, 고문 끝에 목이 잘리면서도 신앙을 지켜낸 정약종을 다시 본다. 결국 진실은 언젠가는 살아나 스스로를 증언하고 정의는 늘 선한 사람들 편이며 역사는 결코 우리 민족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이 책,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들의 시대는 어떠한가?”

이승훈은 물었다.
“너희들의 시대는 주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열린사회의 지향을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몰지는 않는가?”

정조는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의 시대에도 나처럼 부친을 죽인 적당(賊黨)과 타협하며 미래를 지향했던 정치가가 있는가?”

정약전은 물었다.
“너희들의 시대에도 불의한 시대에 대한 절망을 민중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사람이 있는가?”

그리고 정약용은 물었다.
“너희들의 시대에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 않는가?”

윤기종 안산 YMCA 이사장  webmaster@ansan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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