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 동화작가 (안산덕성초등학교 교장)

불볕 온도를 매일 경신하는 무더위로 멀게만 느껴지던 가을이 이젠 피부로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모기의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났고,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 절기도 며칠 남지 않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제철식품으로는 포도를 손꼽는다. 예로부터 포도순절(葡萄旬節)이라 하여 백로에서 추석까지의 기간을 일컬었다. 학창시절, 어른들의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에 기체만강하시고…’라는 가을 편지 문구가 떠오른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쌓던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약해진 자리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어차고 있다. 활짝 핀 코스모스가 가을의 전령사로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고추잠자리의 날갯짓을 흉내 내는 꼬마들의 몸짓이 수채화처럼 가슴에 들어온다.

우리들의 마음을 가장 순수하게 해주는 가을이 오고 있다. 하늘은 점점 달개비꽃잎처럼 물이 들고, 고유의 명절 한가위도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블랙홀 같은 정국에 가을은 먼 낯선 손님처럼 느껴지고 있다.

나라 전체가 이석기 국회의원의 블랙홀에 빠져들고 있다.

현직 국회의원이 내란음모 혐의로 국가정보원의 수사를 받고 있다니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경악을 넘어 청천벽력이다. 모든 미디어 매체들의 앞자리를 도배하다시피 장식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국정원이 소설을 쓰고 있다며 촛불집회까지 열고 있다. 허위 날조, 공안 탄압, 국정원의 당원 매수 사건이라며 연일 목소리를 높이며 안간힘을 쏟고 있다.

국정원이 발표한 녹취록대로라면 우리나라의 안보의식과 국가관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대로 가면 절대 안 된다. 확실한 사실과 증거로 모든 것을 밝혀야 한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주장이나 추정 등은 가차 없이 배제하고, 오로지 사실 확인과 명확한 증거 제시로 매듭을 풀어나가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합진보당은 말을 바꾸고 있어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석기 의원의 행적에 의심이 가는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가 맡은 상임위 업무와는 무관한 주요 자료를 국방부와 KBS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지적에 당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의원직을 이용해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기밀을 취득하고 있는 만큼 여야는 서둘러 의원을 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예서제서 높아지고 있다.

정기국회가 9월 2일 개원되었다. 국회의원들이 정신 바짝 차려 이번만은 제대로 밥값을 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통합진보당의 국회의원을 만든 것도 이해관계에 얽매인 정당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란음모 협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이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이석기 의원의 블랙홀에 빠져드는 정국을 보며 문득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의 트로이 목마가 떠오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보면, 그리스가 트로이를 무너뜨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트로이 목마가 등장한다. 그리스는 트로이를 둘러싸고 10여 년간 전쟁을 벌였으나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그리스는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30여 명의 병사를 그 안에 매복시켰다. 그리스가 이 목마를 버리고 거짓으로 퇴각한 척하자, 트로이 병사들은 목마를 승리의 상징으로 여기고 성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날 밤 목마 속의 그리스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 놓았다. 성 밖의 그리스 군대는 성 안으로 쉽게 쳐들어가 긴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컴퓨터 업체에서 트로이 목마는 악성 코드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유용한 프로그램인 것처럼 위장, 이용자들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설치를 유도하는 프로그램들을 트로이 목마라고 부를 정도다.

우리나라 곳곳에 트로이 목마가 악성코드처럼 수없이 숨겨져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석기 의원의 혐의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에는 우리 사회가 종북의 위험성과 안보의 위기에 대해 얼마나 큰 불감증에 젖어 있는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가을은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계절이다. 특히 정치인들에게 성찰의 기회가 되는 가을이길 바란다. 국민들의 응어리 진 가슴을 시원하게 펑 뚫어주길 소망한다.

류근원 동화작가 (안산덕성초등학교 교장)  kwroo54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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