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 동화작가 (안산덕성초등학교 교장)

그러나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목적지를 안내해 주고 있다. 아주 친절하게 주변의 정황까지 자세하게 보여주면서 말이다.

2004년 국립국어원이 내비게이션을 ‘길 도우미’란 순화어로 내놓았다. 1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내비게이션을 ‘길 도우미’로 사용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 보았다.

오히려 ‘길 도우미’란 순화어를 사용하는 나를 이상한 외계인 정도로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한글날이 22년 만에 공휴일로 재지정 되어 어느 해보다 많은 행사가 치러졌다. 그러나 외형적인 보여주기 식 행사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글은 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독창성과 과학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고유한 글을 가진 국가는 20여 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글을 사용하는 세계 인구도 이제 8000만 명을 넘었다는 기사는 자부심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막상 한글의 현실을 살펴보면 그렇게 가들막거릴 일도 아니다. 실제 길거리에 삼삼오오 걷는 학생들 곁을 지나치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고 만다. 욕설과 비속어 등 공격적 언어 표현이 줄줄 튀어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래어, 문법에 맞지 않는 높임말과 줄임말, 어법에 맞지 않는 말 사용이 범람하고 있다. 충격적이고 서글픈 우리말의 현주소이다.

음식점에 가면 손님들이 너도 나도 ‘언니, 이모’를 호칭하며 음식을 시킨다. ‘여보와 당신’이란 정겨운 말이 있는데도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아내들이 부지기수이다.

백화점에 가면 상점 직원들이 연세 지긋한 어른에게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시선 끌기에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커피를 기다리는 손님에게 직원은 ‘커피 나오셨습니다.’라고 이야길 한다. 이쯤 되면 한글이 수난을 겪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부기관, 공기업, 민영화 기업들도 도토리 키 재기이다. LH, K-WATER, KT&G, NH, KT, KDB, IBK, KOBACO, KORAIL…. 해괴하기 그지없다. 세종대왕이 다시 나타난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 아닌가? 대단히 혼란스럽다.

더욱이 일본 귀화인 오선화(한글 이름 기재도 불쾌하지만)는 지난 7월 극우성향 잡지에 서 ‘한글 우대 정책이 세대 간 문화 단절을 불러오고, 한국인이 노벨상도 받지 못하게 했다’라고 주접떨어 국민적 공분을 샀다.

한글날 즈음에 우리나라 주요 신문들이 앞다투어 한글날에 관한 특집 기사를 연재했다. 눈에 들어오는 기사도 많았다. 그러나 안산신문의 10월 첫 주 ‘한글날 기념 특강 기사’가 단연 돋보였다.

눈에 확 들어왔다. 안산신문이 여느 중앙신문의 기사보다 더 독특한 그러면서 가장 한글날다운 한글날 기사를 실었다. 지난 9월 27일 안산 강서고등학교학교에서 독특한 직업을 갖고 있는 강사가 한글에 관한 특강을 했다. ‘한글, 자연의 모든 소리를 담는 글자’란 주제였다.

주제는 그가 엮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의학박사인 유은실, 그의 직업과는 사뭇 다르기만 한, 전혀 어울리지 않는 특강에 관심이 갈 수밖에.

“나도 훈민정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른 채로 살아가기에는 훈민정음과 한글에 담긴 뜻과 이치가 너무나도 아깝다.”란 한글 사랑의 의지를 강력하게 내보이는 강사였다.

더욱이 “한국 사람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어떤 측면에서 우수한지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다. 훈민정음과 한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순간적인 흥미를 보일 뿐,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거나 공부해보려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라며 한글이 처한 현실 지적엔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으리라 믿는다.

이러한 한글 사랑을 소박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한글이 더욱 아름답게 꽃 필 수 있을 것이다. 한글날 즈음해서만 한글 사랑 운동을 펼친다고 아름다운 우리말이 정착되는 것이 아니다.

교육부를 중심으로 사회와 학교, 가정에서까지 우리말 사랑 운동을 체계적, 지속적으로 실천할 때 한글은 더욱 세계로 뻗어나가고 우리의 언어생활은 그지없이 윤택하여 질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에게 길을 물어서야 되겠는가? 대한민국의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류근원 동화작가 (안산덕성초등학교 교장)  kwroo54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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