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동화작가>
 
시골길을 걷다보면 가끔씩 폐가가 눈에 띈다. 폐가를 지나게 되면, 여름인데도 서늘한 기운이 쏴아 밀려오는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끼 낀 기와지붕 틈에까지 망초들이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는 그리움으로 핀 것일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이 살다 간 집일까? 어떤 사연들이 담긴 집일까? 생각의 우물 쪽으로 빠지게 되면 자연스레 발길을 멈추게 된다. 기우뚱 서 있는 철문 너머 마당 구석엔 농기구들이 녹슨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고, 잡초들은 마루 아래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길고양이들이 제 집인 양 인기척에도 아랑곳 않고 뛰놀기에 열중하고 있다. 
무너진 토담 아래 봉숭아 몇 포기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래도 죽지 않고 용케 꽃을 피운 모습이 못내 대견스럽다. 안쓰럽기까지 하다.
절로 시와 노래가 흘러나온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숭아 반만 벌어~.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읊조리는 시와 노래마다 그리움과 아픔이 배어나온다. 그만큼 봉숭아는 한과 애틋한 정이 가득 담겨 있는 꽃이다. 
고려 시대, 충선왕이 젊은 시절 원나라로 끌려갔다. 함께 끌려간 기녀 속엔 가야금을 잘 타는 기녀가 있었다. 기녀는 왕과 고향의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에 피가 흐를 정도로 가야금을 탔다. 세월이 흘러 충선왕은 고려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았다. 충선왕은 손가락마다 헝겊을 감고 왕을 위해 가야금을 탄 기녀를 못 잊어 궁궐의 뜰에 봉숭아를 심게 했고, 그 뒤 봉숭아 꽃잎을 빻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아픈 전설이 서려있는 봉숭아 외에도 채송화, 과꽃, 백일홍, 패랭이꽃, 분꽃 등 어린 시절부터 많이 보았던 꽃들을 좋아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화려함 보다는 작지만 우리의 꽃들로 관심이 바뀐 것이었다.
교직생활 중간관리자가 되면서부터 우리의 꽃씨를 모으기 시작했다. 길을 가다다 꽃을 보면 꽃씨를 몰래 따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꽃씨의 종류가 늘어나 지금은 50여 종이나 된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화단 가득 그렇게 모은 꽃씨를 뿌렸다. 꽃 명찰도 달아 아이들이 오가며 절로 꽃 이름을 알게 했다. 꽃 명찰도 없는 작은 풀꽃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게 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무릎을 구부리고 눈 맞춤을 해야 비로소 자세히 볼 수 있는 풀꽃들. 그 모습을 보고 “풀꽃 속에서도 또 다른 세상을 볼 줄 아는 00초교 어린이”라는 슬로건을 정해 인성교육을 펼치기까지 했다. 그렇게 15년이 훌쩍 넘은 세월이다.
교장이 되면서부터는 독서골든벨을 본 따 학교 화단에 심어져 있는 ‘꽃잔치 골든벨’까지 개최하게 되었다.
꽃 행사를 치루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교생 봉숭아 꽃물들이기 행사였다. 그럴 때면 내 손톱에도 아이들이 봉숭아 꽃물을 들여 주었다. 뭉툭하고 못생긴 손이 그렇게 멋지게 보이긴 처음이었다.
유년시절 초등 2학년 때였다. 옆집에 딸 부잣집이 있었다. 나 보다 대여섯 살 쯤 나이 많은 누나가 있었다. 살갑게 대해주는 그 누나가 우리 누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그 누나가 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 주는 것이었다. 친구들에게 계집애처럼 손톱에 꽃물 들였다고 놀림을 받았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내게 꽃물을 들여 주던 그 누나의 하얀 손을 아직도 아스라이 기억하고 있다.
퇴임을 하면서 그동안 손길이 갔던 꽃마다 씨를 받아 봉투에 넣어 고이 간직하고 있다. 언젠가 귀촌을 하게 되면 마당과 울타리에 멋지게 심어야지. 그러나 종이상자에 차곡차곡 보관한 씨앗봉투는 벌써 4년을 넘기고 있다. 긴 수면 상태에 들어간 꽃씨들에게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이 여름 가기 전,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 보는 자투리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유년시절로 되돌아가고, 어리석지만 그래도 첫눈 올 때까지 꽃물이 지워지지 않는 기다림으로 살면 팍팍한 삶이 조금은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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