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북치는마을>

  이 책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의 한 명으로 27세 나이에 요절한 허난설헌의 삶을 그의 몸종 ‘비금’의 시선으로 그린 소설이다.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처음 허난설헌의 시를 만나는 순간, 시인의 가슴 아픈 삶에 사로 잡혔단다. 그 후 사회의 모든 분야, 교육의 모든 과정에서 여성을 은근히 배제하는 문화를 오랫동안 경험해 온 작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한 소명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미투, 위드유 운동 등 성 평등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요즈음, 과거 역사 인물로 삼종지도란 굴레 속에서 숨 막히는 시대를 살아야 했던 허초희의 삶을 다시 되돌아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역사에서 난설헌 자신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았고 자신의 감정에, 또 자신의 목소리에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시로 썼을 뿐이고 자신의 시를 모두 다 불태워달라는 유언까지 했다는데.
  작품은 몸종 비금의 탄생, 혼례 직전의 삶, 결혼 생활과 오라버니의 유배, 두 아이의 연이은 비극, 아씨의 죽음과 비금이의 자유, 비금이의 애도로 전개된다.
  “나는 당신의 손끝에서 태어났다.”로 시작된 글은 허난설헌 아씨의 그림 ‘앙간비금도’ 속의 붉은 저고리 소녀를 ‘비금’이로 형상화시킨다. 아씨의 몸종이지만 어릴 때부터 아씨와 동생이나 친구처럼 지낸다. 비금은 보름 후에 혼례식을 올릴 15세 아씨에게 못 잊을 기억을 안겨주고 싶어 아씨와 함께 한밤중에 남장을 하고 외출을 감행한다. 지난 가을 시화에서 아씨가 쓴 시를 칭찬한 샌님과의 만남을 위해서다. 하지만 아씨와 함께 탄 배가 순식간에 뒤집히면서 낯선 사내의 구출을 받는다. 그런데 그 사내가 바로 아씨가 만나고자 했던 샌님, 손곡 이달 선생이었다. 이렇게 그와의 인연은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고, 아씨의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아버지 허엽과 두 오빠 성과 봉, 그리고 동생 균과 함께 5문장가로 불린 난설헌은 서얼 출신인 손곡 선생을 통해 당대 조선의 모순과 한계를 통찰하게 된다. 자신에게 때를 만들 기회조차 박탈하는 시대를 억울해하며 속상해한다. 당시 여성의 지위는 낮았던 게 아니라 아예 없었다. 삼족을 멸할 때도 여성은 안 죽이고 개, 돼지랑 함께 나눠가졌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난설헌은 일반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자신의 시에 포섭하면서 더욱 깊은 자신의 문학 세계를 이뤄나간다.
  결혼으로 난설헌이 경기도 광주의 본가로 가게 됨에 따라, 교전비로 가게 된 비금은 아씨의 힘든 시집살이와 오라버니의 유배 소식, 두 아이를 연달아 잃게 되는 참담한 고통을 함께 한다, 비금 자신도 서방님의 오른팔 격인 하인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오는 내내 죽음을 생각한다. 어느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 비금은 아씨로부터 면천 문서를 건네받는다. 그리고 아씨는 2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이후 비금은 전라도 광주의 무등산 자락 암자에서 우연히 손곡 이달을 만나고 거기에서 몇 날을 함께 머물며 지낸다. 비금은 자신과 아씨의 분신 같은 존재로 ‘홍희’를 낳는다. 홍희의 아배는 샌님이고, 물리적 어미는 비금이 자신이지만 아씨의 자식으로 상상한다, 그리하여 홍희를 보며 비금은 “너는 진실로 누구의 딸이냐”고 속으로 묻는다. 결국 비금은 아씨가 못 다 이룬 판타지를 대신 이루는 ‘아씨의 도플 갱어’인 것이다.
  작가는 비금을 통해 사회적, 신분적 한계를 넘지 못하고 그 속에 갇혀 지낸 아씨보다 사회의 맨 밑바닥의 고달픈 인생이더라도 도발적이고 씩씩한 자아를 보여준다. 이는 우리 시대의 제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고 수용되고 있는가라고 묻는 듯하다. “우리 사회가 유교 사회”이고, “대학교까지는 서구 교육을 받다가 결혼하거나 직장 들어가면 조선 시대로 간다”는 철학자 강신주의 비판처럼 아직도 여성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 위상의 현 주소는 어디쯤일까? 가정에서부터 “누구 엄마”가 아니라 “내 이름은 비금이다.”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세상인지부터 곱씹어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난설헌의 탄생 455주년이 되는 해이고, 그가 사랑했던 동생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 2018년에 출간된 것은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것 같다.

임기성<중앙도서관 시민서평단>

안산신문  ansansm.co.kr

<저작권자 © 안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