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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이 전부는 아니다
  • 안산신문
  • 승인 2020.02.1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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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우리에게 친숙한 전래동화 중에 ‘효녀 심청’이 있습니다. 산 높고 물 맑은 마을에 앞을 보지 못하는 ‘심봉사’가 살았습니다. 심봉사에게는 어여쁜 딸 청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청이의 엄마는 청이를 낳고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청이는 자라면서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살림은 물론이고 아버지를 돌보는 일까지 청이의 효심은 지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이의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청이의 아버지 심봉사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개천에 빠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마침 개천을 지나던 스님이 심봉사를 구했고, 스님은 심봉사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봉사에게 공양미 3백석만 있으면 눈을 뜰 수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평생에 앞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심봉사는 덜컥 공양미 3백석을 구하겠다고 약속했고, 이 사실을 청이에게 말하게 됩니다. 청이는 몇 날 며칠을 궁리를 하다가 청이 또래의 소녀를 구하는 뱃사람들에게 자신을 팔아 공양미 3백석을 구하게 됩니다.
  청이는 아버지 심봉사에게 부잣집 정승댁에 수양딸로 가는 조건으로 쌀 3백석을 얻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뱃사람들과 약속한 그 날, 청이는 바다에 자신의 몸을 던져 제물로 바쳐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청이의 지극한 효심은 바다의 용왕을 감동시켜 다시 바다위로 돌려보내졌습니다. 그리고 뱃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뱃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연꽃에 싸인 채로 육지의 임금님께 바쳐졌습니다. 그렇게 청이는 임금의 부인이 되어서 아버지와 눈물의 재회를 하게 됩니다.
  효심이 지극한 심청이는 눈 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하여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는 무모하게 보이겠지만, 아버지의 눈을 뜨게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심청의 간절한 마음은 저뿐만 아니라 이 글을 보고 계신 독자들도 동일하게 느끼시리라 생각됩니다. 특별히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본 분이라면 한번씩 느끼셨을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바친 효녀 심청! 그런데 과연 100% 잘한 것일까? 지금의 관점에서 저는 이 이야기를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우선 청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100%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아버지의 눈이 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100%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청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청이는 왜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소원을 이루어드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으로서 살아가기에 어려운 사회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이 멀다는 이유로 무시 받고, 가족이 아니고서는 돌봄을 받을 수 없는 사회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애초에 서로 무시하지 않고, 사회적인 돌봄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를 희생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변화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모두를 살리자는 생각이 아니라, 함께 한발만 양보해서 다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할 때입니다. 제2의 심청이 나올 이유가 없는 사회가 되도록, 함께 머리를 모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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