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열린글밭 칼럼 서평
기사단장 죽이기
  • 안산신문
  • 승인 2020.08.13 09:23
  • 댓글 0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키미 하루키는 많은 인기만큼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에 반해 뒤늦은 입문자에게는 작가가 1979년부터 구현해 온 관념(이데아)의 세계와 다양한 상징(메타포)을 따라가지 못해 외면 받기도 한다. 하지만 유려하고 정확한 문장과 시어처럼 아름다운 대사는 작가의 과거 작품을 알지 못해도 흡인력 있게 작품으로 이끌기도 한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잊힌 과거를 기반으로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섞여 들고, 많은 사건들을 의연하게 마주하는 인물들의 자연스런 성장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우리의 인생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왕왕 있다는 말이죠. 그 경계선은 꼭 쉬지 않고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권 p.340)

  존재와 비존재가 조금씩 섞여 드는 순간을 구현해내는 작가는 전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양을 쫓는 모험>, <해변의 카프카>에 등장하는 친숙한 관념의 세계(이데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곳은 윤회의 고리 혹은 신이 약속한 장소를 향해 가기 전에 머무르는 멈춰버린 시간이며 미지의 공간이다. 인간과 동물이 정해진 역할에 따라 단순한 일과를 수행하고 하루의 끝에 찾아오는 가벼운 피곤함은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한다. 때때로 들려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는 과거를 회상하게 하기도 한다. 이곳은 꿈으로도 연결되어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자아와 피자아가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관념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교류는 시작된다.

  주인공은 의뢰인과의 면담, 6장의 스냅 사진만으로 수집한 인상을 갖고 초상화를 그린다. 그는 몇 해 동안 스스로의 그림은 그리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아내가 생생한 꿈 한 편을 이유로 이혼을 요구한다. 여러 상념에 잡혀있는 그는 일본화의 대가인 아마다 도모히코의 작업실을 관리하며 그가 남긴 작품 <기사단장 죽이기>를 마주한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수수께끼의 이웃이자 초상화 의뢰인 멘시키와 관념 세계의 안내자인 기사단장을 만난다.

  화가인 주인공은 한 번 본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는 시각적 능력을 통해 미묘하게 달라진 것들의 사이에서 왜곡된 것을 바로 잡는다. 동아시아 전쟁에서 희생된 연인과 동생에 대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담은 <기사단장 죽이기>는 온갖 불온한 것들을 불러들인다. 힘든 순간에 나타나는 메타포(어딘가에서 나를 이끌어주는 무언가)의 조언은 그를 위험에서 구한다. 항상 그를 지켜보고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차의 이름)의 남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어둠을 다스리게 해주며 그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혼자 갇혀 있을 때 가장 무서운 건 죽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영원히 여기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그 공포를 넘어서야 합니다. 스스로를 극복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에 무한히 근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1권 p.451)

  생과 사를 넘어 전해지는 공포는 열정 없는 주인공의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을 멘시키에게서 자신으로 옮겨 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삶과 자신에 관해 무심하던 인물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 ‘기사단장’을 죽임으로써 내면의 어두운 구덩이를 메우고 감정을 채우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과 기억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그 자리를 잃어간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과정 없이 흘려버린 시간은 내면의 문제를 쌓아두고 있을 뿐이다. 문장 위에 찍어두는 작가의 친절한 스타카토는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짚어주고 <기사단장 죽이기>는 내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준다.

이순옥 (중앙도서관 시민서평단)

안산신문  ansansm.co.kr

<저작권자 © 안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산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