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소설가>

가을은 비와 함께 다가오는가? 무더웠던 더위도 며칠째 계속 내린 비로 인해 한 풀 꺾였다. 창 밖의 숲에서 부는 바람에 가을이 묻어온다. 수수수. 나뭇잎 사각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이름 모를 새소리도 찍찍 .찍. 찍찍....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가을 정취에 마냥 젖어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초등학교 동창이라고하는데 이름과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동창회 소식을 전하면서 나의 별명을 부르는 게 아닌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 문신처럼 누구에게도 알려지길 피했던 부끄러운 별명을 그 동창은 태연히 불렀다.나의 이름보다는 별명이 익숙한 것처럼.
 내게는 별명 여럿 있지만 나는 다른 별명보다 특히 이 별명이 정말로 싫었다. 혹시 누군가 알까 두려웠다. 초등학교 시절. 내 남자짝꿍은 코 찔찔이에 어리숙하고 공부도 못했다. 나는 그 애와 앉는 것이 싫어서 공부 못한다고 구박을 했다. 그 애가 어느 날, 책상 가운데 줄을 긋고는 넘어간 나의 새 연필이랑 지우개를 가져가고는 돌려주지 않았다. 만만하게 봤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그 애의 지우개나 연필은 뺏어 와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책이 넘어 와서 가져오는데도 그 애는 아무렇지 않아했다. 달라고 애걸하면 돌려주려고 했는데, 눈도 끔벅 하지 않는 그 애의 태도가 얄미워 그냥 가방에 넣어 집에 와 버렸다.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한 달쯤이나 지난 후에 한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그 애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 시절 시골 아주머니들은 하나같이 후줄근한 차림새로 학교에 올 일이 있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코 찔찔이 그 애와는 전혀 다른 그 엄마의 모습에 놀랐다. 그 애의 엄마는 그 애가 교과서를 두 권이나 잊어버렸다고 찾아달라고 하셨다. 요즘처럼 서점에서 교과서를 구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담임선생님은 칠칠치 못한 짝꿍이 어디 다른 곳에서 잊어버렸을 거라  고, 그 애의 엄마는 분명 학교에서 잊었다고 했다. 그 날 집에 와서야 그 애의 책이 내 책꽂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사건 이후, 내 별명은 '못땡이'가 됐다. 남자아이들은 그 애 편이 되어 나의 못된 행동을 보면 단체로 와서 따지곤 했다. 나는 우리들 장난을 엄마와 학교에 알린 그 애를 더 무시하고 따돌렸다. 은근히 보여주곤 했던 시험 답도 안 보여주고 숙제를 못해와 쩔쩔매도 빌려주지 않았다. 남자 애들이 나를 따돌려도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잘 다녔다. 얼마나 오만하고 건방졌던가. 나의 별명은 그 사건뿐만 아니라 나의 못된 행동의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숨기고 싶은 아킬레스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세상에는 흑이 아니면 백이라는 색깔만 존재하지 중간색은 있을 수 없다는 흑백논리로 맞서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먼저 지쳐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다. 그때처럼 영악하고 야무지게 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짝꿍 보다 더 칠칠치 못하게 산다. 내 책을 빌려주고 누구 빌려줬는지도 모르는 건 애교에 속하고 얼마 전에는 똑같은 책을 세 번씩이나 샀다. 분명히 몇 년 전에 산 것은 기억나는데 필요해서 책장을 몇 번이나 뒤져도 없었다. 다시 사려고 서점에 갔으나 없어서 여기저기 부탁했다. 만만한 친구에게는 내 책 내놓으라고 억지도 부렸다. 친구가 기가 막혀서 웃으니까 오히려 진짜라고 믿기까지 했다. 며칠 뒤 서점에서 연락이 와서 반갑게 사 왔는데, 다음날 친구가 ‘부탁했었지’ 하며 구해다 주었다. 그런데 그때서야 책장에서 그 책이 꽂혀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
 여기저기 청탁 들어오는 원고도 항상 마감이 지나서야 내고, 옛날의 짝꿍처럼 코만 흘리지 않는다 뿐이지 화장하는 것도 귀찮아서 맨 얼굴로 잘도 다닌다. 그때 그 애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초등학교동창은 똑똑한 못땡이라고 불렀다. 친구들이 '못땡이’가 가장 보고 싶어 한다며 코로나19가 지나가면 꼭 만나자고 했다. 그 짝꿍은 어떻게 변했을까? 순한 애였는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길거리에서 만나도 모르고 지나겠지. 그 짝꿍이 나로 인해 받은 일로 두고두고 마음의 상처는 되지 않았을까?  그 애를 만나면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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