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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종길의여행이야기<87>슬세권 여행지도를 만들어 보자
  • 안산신문
  • 승인 2020.10.2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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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재생하는 곳에서는 ‘동네 책방’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곳은 그냥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문화를 전달하고, 지역을 판매하는 관광 안내소가 되기도 한다. (제주도 제주시)

 “이 지점을 조금 확대해보면 그 속에서 지붕, 안테나, 채광창, 정원, 연못, 거리를 가로지르는 황단보도, 광장의 가판대, 경마장이 보입니다. 그 지점은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버섯만큼, 그리고 이제 예전의 도시 안에 에워싸여 있는 완전한 크기의 도시가 됩니다. 새로운 도시는 옛 도시의 한가운데서 점점 더 자리를 넓게 차지해가고 이전 도시를 밖으로 밀어냅니다.” - 이탈로 칼비노의 시 ‘숨겨진 도시들 1’ (시집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발췌) 중에서 인용 -
  
 슬세권 여행지도를 만들어 보자


   코로나 팬데믹 쇼크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조이고 때로는 우울하게도 한다. 언제 끌 날지도 모르는 이 황당한 상황이 꿈이런가 할 때도 있다. 절망의 한 끝에서 그래도 조그마한 반가운 소식을 발견하려는 것이 약한 인간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지만, 우리 동네를 좀 돌아보게 되었다는 사람, 그동안 멀리했던 책을 찾아 읽었다는 사람, 공기가 새삼 소중하게 여겨졌다는 사람들 등이 있다. 물론 이들이 다 행복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나마 하나라도 위안이 된 일들을 찾아내었거나 우연히 다가온 것을 거부하지 않고 마주했다는 정도다. 필자의 한 선배는 “우리 빵 가게는 매출이 늘었는데 주변에 말하기가 그래서 말 못 하고 있다.”고 하였다. 어떤 후배는 지금이야말로 소액자본으로 창업을 해볼 기회가 아니냐고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를 폈다.
   우리는 새로운 용어들의 홍수에서 살아가고 있다. ‘슬세권’이라는 말도 언젠가부터 쓰이기 시작하더니 떡하니 ‘시사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네이버 지식백과의 시사상식사전에는 ‘슬리퍼와 세권(勢圈)의 합성어로 슬리퍼와 같은 편한 복장으로 각종 여가·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주거 권역을 이르는 신조어다.’라고 정의하였다. 또 추가 설명의 일부를 요약하면 ‘카페·편의점·극장·도서관·쇼핑몰 등 각종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주거 권역을 뜻한다.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슬세권이 거주지 선택의 중요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슬세권을 중시하는 이들은 자신의 생활권 근처에 얼마나 많은 여가시설이 가까이 있는지를 우선 파악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즉 누가 ‘살기 좋은 곳’을 선택할 때 이제는 교통이 편한 도시보다는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시설이나 업소가 있는 곳 - 슬세권을 더 선호한다는 의미이다. 일하러 갈 때는 교통이 좀 불편해도 쉬고 가족과 함께 외출 나갈 때는 걸어갈 만한 곳이 있는 곳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슬리퍼나 편한 신발과 복장으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를 어느 정도로 보면 될까? 역세권이나 공원까지의 거리가 보통 500m 이내면 좋은 곳이라 하는데, 슬세권에서는 집에서 1km 정도면 어떨까 제안해본다. 보통 성인이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면 되는 거리이고 출퇴근처럼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허허벌판이거나 도로만 있는 거리라면 거리와 무관하게 슬세권이 아니다. 걷는 길이 골목이나 상가 또는 문화시설 등이 있는 거리이거나 가로수가 잘 자라 도시숲이 형성되어 편한 곳이면 된다. 그래서 독자 여러분이 거주하는 곳에서 1km 이내의 걷는 길을 찾아보고, 그 거리나 골목에 어떤 곳이 있는지 파악하면 되는 일이다. 걸어가며 종이지도를 만들어 표시하면 그게 지도다. 물론 컴퓨터 길 찾기 지도를 활용할 수도 있으니 핸드폰을 활용해도 좋다. 지도 이름을 ‘우리 동네 슬세권 여행지도’로 정해도 된다. 지도를 만들기 위한 산책도 여행이라 생각하고 편하다.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함께 걷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면 협업을 하면 더 좋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대상지의 평가 기준을 만들어 리뷰도 할 수 있다. 더 신기한 것은 그전에 지나다니면서도 몰랐던 맛집이나 분위기가 특별한 카페나 작은 동네 책방도 찾게도 된다.

1,500년 된 뽕나무와 꽃밭. 이런 특이한 나무와 화단도 지도에 표시하고 기록하면 아주 좋은 정보가 된다. (서울 영등포구)

   자 그러면 이번엔 동쪽으로, 그 다음엔 하천을 따라, 보고싶은 영화를 하는 극장이나 나무가 많은 공원 주변을 걸어 가보자. 이런 여행은 서둘 필요도 없고, 정해진 일정이 없으니 걷다 보면 2km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은 아니니. 무리는 하지 말자. 어떤 때는 비슷한 이유로 걷는 이웃과 동행을 할 수 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재미를 마음껏 느끼려면 반가운 이웃이 필요한 법이다. 복장? 자유다. 현대는 자유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겨울이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으면 어떤가? 최근 기온이 조금 쌀쌀해지니 벌써 겨울 코드나 패딩을 입고 나온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슬세권 여행은 자유로운 생활양식을 즐기고 잘 어울린다면 지역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제 밖으로 조금 비켜나간 바가 있지만, 지도가 ‘로컬 크리에이터(모종린 교수의 책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 참조)’에게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코로나 사태 이후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슬세권의 상권들이 득을 보는 경우도 생겼다(기사 ‘코로나 무서운데, 집 앞서 놀까? ... 떴다, 슬세권’에서 인용).
   어쨌든 우리 동네, 우리 지역이 소중하게 하게 다가오는 시기에 살면서 ‘내(여러분 각자)’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고 새로운 생활양식이 어느새 우리 곁에까지 다가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젠 내가 만든 지도 속에서 새로운 디자인과 용어들이 우리 동네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살펴보자. 나와는 다른 사람 그리고 다른 세대가 세상을 주도하여 어떻게 바꾸려는지 그 모습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저 멀리 해외나 다른 지방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현상을 만나는 경이로움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자, 작은 노트와 연필 한 자루를 넣은 에코백을 들고 나서자. 지도에는 길과 이름만 적지 말고 그림과 생각나는 좋은 글귀도 적어보자. 즐겁게 도전하는 마음으로. 누가 아는가 내 생각이 바뀔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그 세상으로 들어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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