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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 안산신문
  • 승인 2020.12.2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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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빛의 과거>, 작가가 오랜만에 발표하기도 했고 은희경이라는 이름을 믿고 집어 들었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독자층이 탄탄한 이 작가의 말은 심상치 않다. 10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제목이 달라졌을 것이고 주인공의 나이가 50대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육십 대가 된 작가의 이력이 주인공 김유경의 모습으로 비춰진 자전적 소설이어서일까. 결코 짧지 않은 세월, 파편 기억들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 이 쉽지는 않았을 터, 십여 년을 녹이고 풀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오래 걸려 썼다는 소설이다.
  주인공 김유경은 40년 전 여대 신입생 시절 기숙사에서 만났던 김희진을 회상한다. 가장 친한 것과는 상관없이 가장 오래된 친구라고 서술하며 아득한 기억 저편 김희진과 겪었던 추억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스토리는 전개된다. 1977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전혀 다른 기질의 두 여자 김유경과 김희진이 같은 공간에서 겪었던 일들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며 상처를 주고받고, 미묘하게 보이지 않는 팽팽한 줄로 연결되어 있다. 김유경은 말더듬이라는 약점이 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만큼은 아니었고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대체로 눈치채지 못한다. 말더듬이라는 걸 지적받고 상처 입은 어린 시절 이후, 끊임없이 그 사실을 감추는 요령을 연마한 덕분이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발표도 질문도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든 먼저 말을 거는 법도 없었다…. 대신 나는 조용한 모범생으로 보이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책을 즐겨 읽었는데 몇몇 친구들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나를 신뢰했다.”113쪽
  김유경이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가능한 말을 적게 하며 발음이 어려운 말을 할 때는 숨을 고르며 잠깐씩 말을 끊는 모습에 대해 김희진의 생각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무슨 치명적 장애나 결핍이라도 되는 듯 이 감추려 들고 괴로워하는 것이 한마디로 남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공주병’으로 보여졌던 것이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소설로 중견작가가 된 김희진은 기숙사에서 함께 했던 사생들을 자신의 눈에 비친 다양한 색깔의 공주들로 등장시켰다. 하지만, 김희진과 동일한 시간을 공유했던 김유경은 여대 기숙사에서 겪었던 공주들의 삶을 전혀 다름으로 인식하며 두 사람의 상반된 시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와 남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자기가 편한 대로 기억할 것이고 어차피 인간은 자기중심의 이기적 편향이 있다고 하니까. <빛의 과거>는 20대 초반의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지고 상경한 여학생들의 기숙사 생활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마치 여자 기숙사를 들여다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발랄한 여대생들의 관심사와 빼놓을 수 없는 미팅 이야기, 관심 있는 파트너에 촉을 세우며 미묘한 연적이 되기도 하는 그녀들은 분명 시대의 공주들이다.
  기숙사의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그 태도가 남달랐던 김희진이었다. 어리숙한 모습으로 막 상경한 신입생들에 비해 재수생으로서 서울 생활을 먼저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는 머리 회전이 빠르고 계산적이었으며 늘 자기중심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가는 능력이 있었다. 김희진에 비해 김유경은 비교적 평범한 모습이고 매사에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그녀는 자기만의 색깔을 분명히 가진 인물이다. 문제 상황이 야기되면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 충돌을 회피하는 유형이다. 그러나 김희진의 스타일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으며 결코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수십 년을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오래된 친구로 존재한다. 기숙사에서 처음 만난 각각의 기질을 가진 인물들과 그녀들이 펼쳐가는 청춘의 이야기들은 1970년대 유신정권의 분위기를 언뜻 보이며 사회적 이슈들과 문화의 패턴들을 잠깐씩 엿볼 수 있지만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시대의 아픔과 젊은 지식인들의 고민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 역시 동시대를 함께 지나왔기에 들었던 느낌이다 
  작가는 40년 전의 인물들을 불러내어 그녀들의 여러 모양의 삶을 들여다본다. 스무 살 남짓 그녀들의 꿈과 소망했던 삶이 어떠했던 수 십 년의 세월을 보낸 현재, 누가 성공한 인생인지 정답이 없음을 보여준다. 김유경이 결코 좋아할 수 없었던 김희진의 주변에 맴돌 수밖에 없는 것, 고학생이던 김희진이 그리 발버둥 치며 유경을 넘어서려 했지만 소설의 말미에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며 담담히 마음에 담는 모습이다.
  감정선을 마구 흔드는 로맨스도 없고 억압의 시대를 아파하며 고민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았다는 나이 든 작가의 진정한 삶의 해답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이제 막 인생의 꽃을 피우며 시작하는 청춘들과 또한 그 시절을 회고하며 삶의 정의를 한번쯤 생각해 보는 분들이라면 삶을 조망하는 이 소설, <빛의 과거>를 읽었으면 좋겠다.

최정인 (중앙도서관 시민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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