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_푸른숲

'따로 또 같이' 함께 걸어갈 사람.
  이 책은 한비야와 그녀의 남편 안톤이 공동 저자로, 부부의 평범하지 않은 결혼 생활 백서다. 평생 국제구호 현장에서 살아온 부부 각자의 삶만으로도 이미 평범하지 않다. 거기에 '한국 여자와 네덜란드 남자의 결혼'이 더해지는 순간, '평범'의 범주는 일찌감치 훌쩍 넘어섰다.
  그런데 이 평범하지 않은 결혼 생활이 그 어떤 평범한 부부보다 더 잘 굴러가고 있다. 이유가 뭘까.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정한 원칙 또는 규칙이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수시로 극한의 상황과 맞닥뜨려야 하는 오랜 국제구호 활동에서 그들에게 원칙 지키기는 매우 중요한 화두였을 것이다. 게다가 새롭게 발생하는 이례적 상황들 앞에서 원칙을 탄력적으로 수정, 보완해 나가며 업그레이드하곤 했던 경험은 그들에게 탄탄한 근육이 되었으리라.
  그들의 결혼 생활 원칙 중 큼지막한 것 몇 가지를 들여다보면, 대원칙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세부적인 원칙 몇 가지가 더 따라가는 구조다. 하지만 아주 세세한 부분의 행동 규칙까지 일일이 명시해 놓은 그런 딱딱한 형식의 계약서 같은 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만큼 부부로서 또는 오랜 친구로서 서로에 대한 깊은 믿음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는 거다.
  첫째, 3:3:6원칙. 1년의 3개월은 한국에서, 3개월은 네덜란드에서, 그리고 6개월은 각자의 나라에서 각자의 일을 하며 생활하는 규칙이다. 각자 살아온 환경과 터전을 버리지 않고 서로의 삶을 존중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는 것으로 이들의 부부관계 원칙 중 가장 핵심적인 원칙이라 할 수 있다. 떨어져 있는 6개월간도 전혀 왕래를 안 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생활의 중심 터전만 달리할 뿐,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는 함께 보내고 때때로 여행도 함께 한다.
  두 번째 큰 원칙은, 함께 하는데 소요되는 모든 경제적 부담의 50:50 부담 원칙이다. 이 또한 서로 비슷한 경제적 여건을 가진 부부의 합리적 규칙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타인에 대한 도움을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는 그들이 절대 돈에 야박하거나 특별히 민감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사 분쟁의 최소한 절반 이상은 크든 작든 돈 문제가 결부되어 있지 않던가. 다만, 누군가 '그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인정한다.
  그런데 이 두 원칙은 사실, 이들 부부의 결혼 생활 전반을 흐르는 대원칙 '따로, 또 같이'를 뒷받침하는 것에 불과하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p16)로 시작되는 칼릴 지브란의 <결혼에 대하여>의 일부가 초반부에 인용되면서 이미 이들 부부의 결혼에 관한 인식이 어떠한지는 일찌감치 드러나 있다.
  그들이 결혼하기 전 어느 날, 비야는 주문한 과일 칵테일이 나오자 순간 어떤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안톤에게, '자신들이 결혼한다면 과일마다 제맛을 유지하면서 조화롭게 섞여 더 맛있어지는 과일 칵테일식 결혼생활이 될 거'(p268)라 말한다. 이에 안톤도 근사한 표현이라며 맞장구친다. 다시 말해, 이 부부가 추구하는 결혼 생활의 본질이자 핵심인 '과일 칵테일식 공동생활'이란 서로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조화를 이룸으로써 오히려 각자의 고유함과 존재감이 더욱 빛나는 생활을 의미한다.
  비단 이것은 결혼 생활에만 적용되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 생활 속 모든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자세다. 그것을 위해서 "비혼 상태든 결혼 상태든 관건은 '혼자 있는 힘'이고 그 힘을 길러야 한다."(p269) 어느덧 결혼 3년 차인 한비야는 말한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나답게 살고 있다. 과일 칵테일 안에서 내 고유한 맛과 색깔을 지키는 동시에 안톤 덕분에 그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나는 '혼자 있는 힘'을 키우면서 살 거다. 그래야 '둘이 있는 힘'이 더욱 단단해지고 풍성해질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p271)
  부부관계는 물론 모든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소통이란 '말이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함께 걸어갈 사람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덕목을 꼽으라면 일단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부부가 '따로, 또 같이'라는 대원칙 아래 함께 잘 걸어가고 있는 비결은 서로 '말이 잘 통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겠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가? 그리하여 평생 함께 걸어갈 만한 사람인가?' 이 기회에 주변을 한 번 둘러볼 일이다.
  앞에서 이 책이 '한비야&안톤 부부의 결혼생활백서'라고 언급하긴 했지만, 꼭 그런 '관계적인 측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결혼생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속에서 얼핏얼핏 묻어나오는, 국제기구 구호 담당자로 평생 세계 각국을 여행한 두 사람 각자의 인생관, 직업관을 비롯해 세상과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 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함으로써, 평범한 독자들에게 '평범하지 않은 평범함'을 깨우쳐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책이다. 쉽게 읽히고, 재미있으며, 독서 내내 긍정의 에너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박청환 (중앙도서관 시민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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