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제종길의 여행이야기
제종길의 책 이야기<15>전혀 몰랐던 일들이 갑자기 다가왔다.
  • 안산신문
  • 승인 2021.07.21 09:39
  • 댓글 0
‘창작과 비평’은 자주 꺼내 보진 않았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어쩌다 창작물을 일고 나면 필자가 작가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한 마디로 생각하느냐, 아니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썩어진 선비라니 다른 것 아니고 그저 공부하고 출세하고, 잘 살고, 이름나고, 그것만 알았지 사람의 사는 뜻이 뭔지, 역사의 의미는 뭔지, 문명은 발달해서 무엇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것, 그래서 살기는 살지만, 속에 아무것도 얻은 정신적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 함석헌의 글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에서 인용 -
 
   전혀 몰랐던 일들이 갑자기 다가왔다.


   필자에게 1979년은 그동안 생각해 왔던 세상을 온전히 다르게 다시 보아야 하는 사건이 있었던 해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문이었다. 그전에도 시대에 맞지 않는 군사독재 정치와 머리와 옷을 단속하는 국가가 제대로 된 나라는 아니지라고 생각을 해왔다.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가장 싫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다른 사항에 관해선 관심이 없었고, 지식이나 정보도 없었다. 고민이 있다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취업을 하지가 고민이었을 뿐이다. 그랬어도 군 현역별 시절 군내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항상 야당을 찍었다.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타고난 반골 기질 탓이기도 하고 저항 장식이었다. 그래놓고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야 했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가 다행이었다. 일병 시절에 우리 부대로 부임해 온 신임 소위가 있었는데 대학 시절 대학 스쿠버다이빙 클럽 회장을 했다고 하여 다른 장교보다는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가끔 반정부 발언을 했지만 동조하지는 못하고 듣기만 했다. 날 믿고 한 말인지 날 떠보려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다. 그러다가 1979년 6월 말에 전역하였고, 7월과 8월에는 잠수(당시에는 스쿠버다이빙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더 많았음)를 배웠고, 9월에 복학하였다. 해양생물학을 전공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그해 10월 말에 일어난 어마어마한 10.26 사건으로 복학 후 겨우 두어 달 다니고 쉬어야 했다. 휴교는 하였어도 학교 근처 막걸릿집에서 학과 선후배들과 만나 사건의 의미와 배후에 관해서 이야길 하곤 했다. 3년이나 4년 후배들과의 대화가 많았다. 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차이가 났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반기는 친구도 있었고,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며 우려하는 친구도 있었다. 필자는 허망하게 사망한 대통령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면서 군사독재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과 사회현상에 관한 이야길 들으며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를 보곤 신문에서 말하는 ‘불온서적을 읽고 데모를 주도하는 운동권 학생’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그 친구에게 끌려 자주 술자리를 하게 되고 “형은 아직 멀었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래도 마음이 따뜻하고 머리가 명석하며 철학에서부터 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는 친구였다. 속으로 “저 정도는 되어야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지”라며 일종의 흠모(?)까지 하게 되었다.
   1980년에는 일 학기 개학이 기다려졌다. 학교생활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군에 가기 전 한 학기는 노느라고 흘려보냈고, 복학 후 한 학기는 사건으로 휴교를 했으니 제대로 대학을 다녀보지 못한 셈이었다. 어느새 2학년이니 잘 다니다 졸업해야지 했지만 새 학기다운 분위기보다는 뭔가 터질 것은 같은 탱탱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학기 초였다. 그런데도 시간이 나면 청계천 단골 헌책방을 다녔다. 마침 그 운동권 후배가 자주 가는 곱창야채볶음을 하는 포장마차도 청계천이 있어 그쪽에서 과 후배들을 만나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서적 외판원으로부터 필자가 전집류를 사게 되었다. 대학에서 꽤 인기가 있었던 ‘창작과 비평’ 전집이었다. 1966년부터 1975년까지 계간으로 발간된 38권을 12권으로 묶어 낸 것이다.

. ‘씨알의 소리’ 여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사진보다 오래된 것이 몇 권 더 가지고 있으나 잘 포장하여 창고에 넣어두었다.

물론 운동권들의 필독서는 아니나 ‘창작과 비평’은 문예 창작물과 사회비평 글과 논문을 주로 게재하는 계간잡지로 답답하고 암울한 시대의 학생들에겐 의미는 있지만, 부담 없는(?) 새로운 읽을거리로 자리를 잡았던 것 같았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에 없지만, 꽤 큰돈이어서 할부로 일 년 정도 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잡지를 개설한 것을 보자.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층의 독자를 확보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고급 계간지가 존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이 땅에 계간지 시대를 개척하였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중략) ‘창작과비평’의 존재는 한 시대의 지성의 밀도 있는 포효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집 구매 바람이 일던 그때의 대학생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평을 한기술 작가의 생각은 1960년대와 70년대인지를 말한 것인지를 알 길이 없다. 다음은 창간호에 실린 글들이다. ‘어느 理髮所에서(李浩哲) / 多産性(金承鈺) / 現代의 狀況과 知性(싸르트르) / 文化와 政治(밀즈) / 韓國 文學의 전제조건(柳宗鎬) / 새로운 創作과 批評의 姿勢(白樂晴) / 現象學的 美學(曹街京) / 政治分析의 諸問題(李廷植) / 感性과 批評(金禹昌)’ 이 잡지가 백낙청 교수를 중심으로 한 동인지 성격으로 출발하였다고 하니, 이를 참조하고 창간호의 저자들을 살펴보면 다른 시각에서 잡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1980년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잡지가 ‘씨알의 소리’였다. 정부에 대한 비판의 글이 실렸고, 그 당시로도 허름해 보이는 옛날 책 같은 표지가 있어 왠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함석헌 옹이 창간한 잡지다. “4·19혁명 10돌을 맞은 지난 1970년 4월 19일 <씨알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박정희 정권하의 사이비 언론에 맞서 '언론의 게릴라전'을 펴나갔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얼어붙은 야만의 시대에 그는 ‘자유 언론 없으면 죽음’이라는 일념으로 ‘돈도 되지 않는 잡지를 사재를 털어서’ 시작했다. 그러나 <씨알의 소리>는 1호를 내자마자 곧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강제 폐간을 당한다. 그 후에도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탄압으로 <씨알의 소리>는 폐간과 복간을 거듭한다.” 2018년 창간 48주년을 앞둔 시점에 오마이뉴스에 난 인터뷰 기사 일부를 옮겼다. 오랫동안 나와는 무관한 일 같은 내 주변에 와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대학생인 필자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서울역과 가까운 곳에 남동생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들를 일이 있어 갔었는데 대학생처럼 보이는 남녀 학생 세 명이 내게 다가와 종이 몇 장을 건네주고 쫓기듯 달아났다. 조잡한 인쇄물이지만 광주에서 무슨 큰일이 생겼다는 것이 적혀 있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고 버렸다. 그 날은 아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이삼일 후였던 것 같다.
 
 
 
 


 
 
 
 

안산신문  ansansm.co.kr

<저작권자 © 안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산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