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동화작가>

가을장마가 유난히 길다. 올처럼 우산을 자주 챙기던 기억이 없는 듯하다. 죽 꿇는 듯한 날씨 변덕으로 우산을 곧잘 잃어버리기도 한다. 비가 올 때는 꼭 필요하지만, 햇빛이 들 땐 귀찮아진다. 날씨 변덕보다 더한 게 사람 변덕,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우산의 역사는 길다. 우산은 라틴어로 그늘을 뜻하는 ‘움브라(umbra)’에서 유래되었다. 귀족들이 태양을 가리기 위해서 사용했으니 우산은 신분과 지위의 역할까지 했다. 우산의 순우리말은 ‘슈룹’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슈룹’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후대의 문헌에서는 잘 보이지 않다가 사라져버렸다. 아쉬운 생각이 크다.
비닐우산이 등장하기 전에는 종이우산을 만들어 사용했다. 한지에 기름 먹인 종이우산이야말로 최고의 우산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수작업이어서 지금은 애장품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청비닐 우산이었다. 센 바람 한 번에 맥 못 추던 우산이었다. 노년층에겐 잊지 못하는 비 오는 날의 추억거리가 청비닐 우산이었다.
경제가 발전하며 우산도 획기적으로 변했다. 기념품으로 제작된 우산, 자외선차단 우산, 거꾸로 우산, LED 우산 등…. 급기야는 우산이 시위 도구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2010년대 이후, 홍콩은 시위가 급증하면서 경찰과 많은 마찰을 빚었다. 최루탄 발사에 대한 대응으로 우산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홍콩인들은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에서 우산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쯤 되면 우산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우산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다. ‘쉘브루의 우산과 메리 포핀스’를 손꼽을 수 있다. 두 편 다 영화 완성도에 우산이 독특한 기여를 했다. 게다가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는 ‘메리 포핀스’ 캐릭터를 이용한 우산 퍼포먼스가 등장해 전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우산을 소재로 한 가요와 시집들도 많다. 그만큼 우산은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풍속화 ‘공원춘효도’가 지난해 68년 만에 안산의 품에 안겼다. 안산시가 4억 9천만 원에 낙찰받아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시험장 안에 커다란 우산 그림이 나온다. 그 안에는 부정행위를 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당시 실력보다 돈과 인맥으로 시험을 치르는 현장을 풍자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머물렀던 미군이 구매해 본국으로 가져간 뒤,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불운의 그림이었다. 안산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그림과 해설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모두가 보아야 할 김홍도의 귀중한 풍속화이다.
국가, 지자체 그리고 많은 기관에서 행사를 치를 때 의전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의전 격식을 따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학교 졸업식 때도 마찬가지, 자리배정과 축사 순서를 놓고 삿대질까지 하는 꼴불견도 많이 보아왔다. 이번에는 우산 의전이 뜬금없이 나타났다. 지난달 27일,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법무부 차관이 아프가니스탄 특별 입국자에 대한 국내 정착 지원 방안을 브리핑하던 중 비가 내렸다. 뒤쪽에 있던 직원이 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우산을 받쳐주고 있는 모습이 뉴스를 탔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세계적인 토픽감 사진이다. 이 정권 들어 국민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는 부서가 법무부이다. 장관들은 줄줄이 말할 것도 없고, 전 차관은 택시기사 폭행 건으로 불명예 사퇴를 했다. 그것도 정부가 감싸주고 감싸주다 여론 폭탄을 견디지 못하고 사퇴를 한 진풍경이었다.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못 하는 정부이다. 이 사진 한 장으로 한국의 인권이 세계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비웃음을 받을지 자못 걱정이 크다. 국격을 한순간에 폭삭 무너뜨린 사진이다. 이 행사는 정부가 세계 인권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엉뚱한 곳으로 튀고 말았다.
지난 4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내로남불’ 단어가 국격을 떨어뜨렸다. 이번에도 그 불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살얼음판을 딛는 자세로 일을 해도 욕먹을 판인데 조심했어야 했다. 비가 내린다. 의전을 좋아하는 정치인들, 우산을 준비하며 새가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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