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동화작가>

비라도 푸슬푸슬 내리는 날이면 주당들의 입에서 꼭 나오는 말이 있다. “이런 날엔 김치전에 막걸리가 딱인데. 어때, 딱 한 잔.” 주당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입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그만큼 막걸리는 우리에게 친근 그 이상으로 다가오는 술이다. 막걸리는 문헌상 1837년으로 추정되는 ≪양주방≫에 혼돈주(混沌酒)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되고 있다. 역사와 함께 애환이 담겨있는 술이 막걸리이다.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이 ‘막걸리의 날’이다. 오래전, 농축산부에서 햅쌀 수확 시기인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막걸리의 날로 정했다. 올해는 28일이 막걸리의 날이다. 왜 하필 목요일로 정했을까? 술꾼들에게는 요일별로 술을 마셔야 되는 핑계 아닌 핑계가 있다. 원(월)래 마시는 날, 화가 나서 마시는 날, 수수하게 마시는 날, 목숨 걸고 마시는 날…. 웃자고 만들어낸 핑계였을 것이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황금들판을 자랑하던 본오뜰이 제 할 일 다 거두어들이고, 고요 속에 묻히고 있다.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허허로워진다. 저 뜰에서 거두어들인 쌀 중에도 막걸리의 재료로 나가는 쌀이 있을까? 뚱딴지같은 질문에 실소가 나온다.
막걸리는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술인 탁주의 일종이다. 술을 빚은 후에 청주를 떠내지 않기 때문에 흐리고 탁한 것이 특징이다. 탁한 것을 그대로 걸러 적당량의 물을 섞어 다시 거른 술이다. 막걸리는 용도에 따라서 이름도 다양하다. 석회와 같은 색깔을 닮아서 회주, 흰 색깔의 술이어서 백주, 농사일 한창일 때 일꾼들을 대접하기 위한 술이라는 농주 등 이름도 많다. 오래전부터 서민들의 사랑을 받은 술로 알코올 도수는 소주보다 훨씬 낮은 편이다. 그러나 다른 술에 비하여 단백질은 풍부하면서도 열량이 낮다. 유산균과 효모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위암 세포의 성장을 억제하고, 종양 크기를 줄이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술 많이 먹어 이로운 건 하나도 없다.
막걸리를 소재로 한 시와 가요도 많다. 가장 기억나는 시로는 천상병 시인이 지은 ‘막걸리’를 들 수 있다.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막걸리를 마시면/배가 불러지니 말이다//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이하 생략’ 또 막걸리의 열풍을 가져오게 만든 가요도 있다. ‘막걸리 한 잔’이 그것이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그날처럼 막걸리 한잔.~’ 막걸리를 소재로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짓게 만드는 가요이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막걸리 애호가는 단연 박정희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막걸리를 청와대로 배달시켜 먹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각 지역을 순방할 때마다, 그 지역 막걸리를 맛보았다고도 한다. 모내기 시절, 모를 심으며 막걸리를 마시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방북 시, 김정일에게 여러 종류의 남한 막걸리를 대접해서 좋은 반응을 얻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애환이 담긴 막걸리이다 보니 웬만한 도시에 가면 그 지역별 특산 막걸리가 있다. 여행 시에는 그 지역 특산 막걸리를 마시곤 한다. 막걸리 지역축제가 벼농사 수확 이후 11월 말까지 벌어지는 곳이 많다.
막걸리에 관한 속담도 많다. 대표적인 속담으로 ‘쓴 막걸리 한 잔도 없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범이 담배를 피우고 곰이 막걸리를 거르던 때’ 등을 들 수 있다.
막걸리하면 떠오르는 대학교도 있다. 고려대학교이다. 그들의 공식 응원가를 개사한 막걸리 찬가가 있을 정도이다. 특히 신입생들에게 희한한 추억을 심어주는 막걸리 파티도 있었다.
올 막걸리 날엔 날씨가 화창하다고 한다. 비가 푸슬푸슬 내려야 막걸리 마시기 딱 좋은 날이지만,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다반사이다. 그래도 어쩌랴. 막걸리 날엔 막걸리를 마셔야 제격인 것을. 대형마트에 가면 다양한 막걸리를 살 수 있다. 알코올이 없는 막걸리까지 있다. 소주보다 독한 막걸리도 있다. 패트병을 넘어 깔끔한 디자인의 용기에 담긴 막걸리를 보면 절로 군침이 돈다. 1만 원이 넘는 막걸리도 쉽게 볼 수 있다. 막걸리값도 많이 올랐다. 하긴 오르지 않는 게 어디 있을까마는. 신나는 일 하나 없는 현실이다. 시름 다 잊고, 그날만이라도 막걸리 맛에 푹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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