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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종길의 책 이야기<26>시화호를 운명처럼 만나다.
  • 안산신문
  • 승인 2021.12.0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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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호 환경 조사 보고서는 줄 잡아 백권도 넘는다. 그리고 각종 모임 발표자료집도 그 정도 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을 가지고 있지만 책장 한칸에 꼽을 만큼만 두고 모두 창고에 두었다.

   『시화호 주변은 우리 땅 한반도의 배에 해당하는데 서해에 살포시 발을 담근 평탄한 지형의 평야 지대를 가지고 있고,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내만을 형성하고 있어 다양한 농수산물이 풍부한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중앙문화와 향토문화가 어우러진 문화수용 형태를 잘 보인다. 또 이 일대는 시대별 사회상의 다양함이 평안하게 녹아 있는 땅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춘 삶의 터전이었다.』 - 연안보전네트워크가 만든 보고서 ‘시화호 어업과 연안 문화’에서 인용 -

시화호를 운명처럼 만나다.

   1986년에 한국과학기술원 해양연구소와 함께 안산에서 첫발을 디뎠다. 허허벌판을 건너 사리 포구를 끼고 돌아서 조금 가다 보면 산속에 아늑한 터에 연구소가 자리를 잡았었다. 4월의 어느 봄날이었는데 아침 일찍 이삿짐과 함께 왔을 때는 너른 갯벌만 눈에 들었지만, 그저 질퍽거리는 땅으로만 보였다. 아직 갯벌의 실체를 모를 때였다. 이사를 마치고 나니 서울 갈 일이 꿈만 같았다. 소공동의 한 호텔에서 선을 보기로 한 날이었는데 생각보다 이사가 늦어 사당동을 거쳐 서울 시내로 접근하는 길을 택했으나 어느덧 약속 시각을 한 시간이나 어겼다. 그래서인지 선본 날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어쩌면 나쁜 일일 때도 반대급부가 있나 보다. 어쨌든 그 선에 만난 사람이 지금의 아내다. 연구소에선 연구동과 본관동을 먼저 지어 자리를 잡았지만, 토지 마무리와 다른 건물 공사의 시작을 앞둔 때라 현장식당이 있었다. 식사는 해결되니 연구동 실험실에서 노총각들은 스티로폼을 바닥에 깔고 출장용 이불을 깔고 덮고 잤다. 함께 자는 동료 연구원이 외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혼자 자야 했는데 어떤 때는 외딴 산속처럼 무섭기까지 하였다.
   그땐 간척사업이 연구소 바로 앞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고, 간척사업의 이름 시화지구간척사업‘인 것도 몰랐다. 군자만이었던 시화호 일대가 그렇게 넓은지도 몰랐고, 이곳의 수산물의 인기가 그렇게 좋은 줄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사리 포구의 번창함은 “사리 이장은 반월면장하고도 안 바꾼다.”라는 옛말로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출근을 하는데 갯벌 위에 온통 뭔가가 널려 있는 것이 있었는데 저서생물들이었다. 놀랐지만 충격으로까지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러한 장면을 언론을 통해서 많이 본 탓일까?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게들과 갯지렁이들이었다. 분명 독극물 배출로 인한 것인데 어떤 물질인지 생물학자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연구실 3층에 있는 해양화학연구실을 찾아 생물들의 떼죽음을 이야기하고 함께 연구하자고 하였더니 여러 연구원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2층으로 내려와선 필자가 소속된 해양생물연구실의 연구원들에게 정기적으로 생물상 모니터링을 해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시큰둥하였다. 연구실에서 말단인 주제에 일을 자꾸 벌이려고 하니 동료나 위촉 연구원들 처지에서는 안 그래도 과부하가 걸려 있는 상태라 퉁명한 건 어쩌면 당연하였다. 게다가 갯벌 조사는 엄청난 체력과 인내심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 누구나 조금 두려워하였다.
   어느 날 화학연구실의 한 후배 연구원이 “형 우리가 개인적으로 시화호 조사를 한번 하면 어때요?” 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좋아하고 능력을 높이 사고 있던 후배라 쾌히 동의하고 의논을 하였다. 필자는 저서생물 채집용 장비를 가지고 오고, 후배는 수질 조사 키트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초여름 한 주말에 만나 사리 포구에서 작은 어선을 한 척 빌려 타고 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리(지금의 해양동)에서 방조제까지 직선거리의 삼 분의 일 정도를 가서 저서생물을 채집하고, 후배 연구원을 오염물질을 알기 위해 물을 떴다. 그리고 선장이 전날 미리 쳐놓은 삼중자망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바닥에서는 조간대 갯벌에 사는 왕좁쌀무늬고둥이 잔뜩 잡혔다. 시화호 내의 수위를 낮아지고 독성을 가진 물질이 배출되자 서식지인 조간대보다 훨씬 깊은 곳 바닥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물 속 바닥 생활을 오래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였다. 생물이 죽어가는 현장을 보자 비로소 가슴이 뭉클해지고 약간의 분노가 일었다. 또 정치망에서는 ‘ㄱ’자로 굽은 숭어가 잡혔다. 다들 “이럴 수가!” 하였다. 그제야 선장이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해서 우릴 데리고 간 곳에서는 석유와 같은 시꺼먼 액체가 두 군데서 솟아올랐다. 아니 끓어 올랐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수면 위로 액체가 부글거리며 올랐지만 높게 솟지는 않아서다. 반월산업단지에서 정화되지 않은 폐수가 마구 시화호로 유입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시화호에 관한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인생의 방향을 상당 부분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적도 연안’이라는 잡지는 아시아지역의 연안통합관리를 주도하는 한 기관에서 발행하는 잡지이며, 시화호는 이 기관의 회원 지역으로 되어있다.

   시화호방조제가 완공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산 지역사회에서 시화호에 관심이 증폭되지 않았으나 폐수 배출과 등이 꺾인 숭어 사진이 언론에 전파를 타게 되면서 지역 환경운동가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시화호 생태공원화를 위한 시민실천단’이 편집한 ‘희망을 주는 시화호 만들기 자료 모음집’을 보아도 1994년 방조제가 완공되고 수질이 급격히 나빠지자 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으로 추정하면 배를 타고 시점이 같은 해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시화호 자료는 보이는 대로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책이라기보다는 기타 자료 수집에 가깝다. 유명 민속학자이자 저술가인 주강현 교수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간척사업에 따른 사라져가는 시화호 일대의 민속자료들을 수집하였던 것과 불안한 미래를 예측에 관한 기록도 보게 되었다. 주 교수에게 전화하여 직접 물어보니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언젠가 시화호에 관한 글을 쓸 예정이라고 하였다. 보고서가 많고 세미나나 심포지엄 발표 자료집 그리고 소책자 등등이다. 예를 들면 2000년에는 안산시가 시화호 간척사업으로 피해를 본 지역사회에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유치해야 한다는 요구를 중앙정부에 하였다. 이와 관련된 보고서로 필자도 연구진으로 참여한 ‘국립자연사박물관 시화호권 유치를 위한 학술조사’가 있고, 2001년에는 안산시가 한국해양연구원(이전의 과학기술원 해양연구소)에 ‘시화호 간척지 내(대부도 일대) 기초지질 및 매장문화재 조사연구’라는 용역을 주었다. 시화호를 조사한 보고서들은 ‘무수히’라고 할 만큼 많다.
   그밖에도 수많은 보고서와 발표자료들이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단체나 안산시 그리고 주변 지역에서 발표 요청이 많이 왔고, 이런 요청을 대부분 수용하여 발표한 자료가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시화호 간척지 이용의 진화 과정과 지역 파트너십’이 있었는데 이 글은 ‘열대 연안(Tropical Coasts)’이라는 외국 잡지에서 2001년에 게재를 원해 약간의 수정을 거쳐 번역 후에 ‘Partnerships for Shihwa Environment Management: Local Governments, Civil Society and Scientific Communities(시화호 환경 관리를 위한 지방 정부들, 시민사회, 과학자들의 파트너십’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안산신문  ansan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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