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제종길의 여행이야기
제종길의 책 수집기<27>내게 중요한 일들이 모두 4월에 일어났다.
  • 안산신문
  • 승인 2021.12.15 09:56
  • 댓글 0
신문스크랩에서는 발견한 것은 적어도 1976년부터 자료를 수집하였고, 처음 주제는 ‘문학’이어서 작가의 꿈을 그때부터 가지게 된 것 같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부서지기 쉬운 /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 마음, /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의 시 ‘방문객’의 전문 인용 -

 

   내게 중요한 일들이 모두 4월에 일어났다.


   인생의 전환기가 된 3년 1986년, 1987년 그리고 1988년은 그야말로 내겐 격동기 그 자체였다. 그 시작은 1986년 4월이었다. 생물연구실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대학으로 옮긴 한 선배가 누굴 소개한다고 하여 약속을 잡았다.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다는 것은 지난 글에서 이미 말하였다. 서울 가는 길이 장난이 아니었다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다. 더군다나 서울 시청 근처 소공동까지 가야 했으니 말이다. 수인산업도로도 왕복 2차선이었고 연구소에서 산업도로를 타기까지 지금의 상록수역 앞에 있는 월드아파트 지나 북고개로 산업도로에 접근하는 길이 유일하였는데 다 비포장도로였다. 출퇴근 때에 교통체증을 상상을 초월 정도였다. 눈이라도 네리면 서울까지 보통 네다섯 시간이 걸리고 어떤 때는 안양까지도 예닐곱 시간이 걸렸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오전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오후는 휴무가 되어 바로 퇴근하기도 했다. 또 승용차를 가진 사람들은 온갖 샛길과 논길까지 알고 있어야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런 좁은 길에서 간간이 전복사고의 소식을 듣던 때였다. 당시 집은 서초동 가장 남쪽 변두리인 청계산 자락 농촌 마을에서 있는 전셋집이었다. 양재동에서 버스 타고 들어가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10분은 걸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주변 자연이 좋아 집에 있는 것을 좋아했으나 가는 길이 멀어 연구소에서 머무는 일 많았다.
   안산까지 4호선이 연장되기 직전이니 통근버스로 사당역까지 갔다. 군포와 인덕원, 과천을 거쳐서다. 물론 대부분 이 차선 도로였다. 사당에서 내려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시청역까지 그리고 내려서 달려야 했다. 지각으로 시작된 만남이 일 년간 이어갔다. 출장이 잦아서 출장 갈 때는 시간이 나는 대로 편지를 쓰고, 돌아오면 마포구 합정역 부근 한 커피숍에서 만나곤 했다. 퇴근 버스들 중 하나가 합정역까지 가서다. 중간중간에 많은 에피소드와 한 번의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나 여기선 지면의 공간의 한계 때문에 생략한다. 다만 열심히 만나고 집중한 바람에 20년의 연구원 생활 중에 유일하게 논문 한 편 쓰지 못한 해가 되었다.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다. 그핸 안산이 반월출장소에서 안산시로 승격된 해였다. 많은 시간을 특히 먹고, 자기를 연구소에서 많이 했던 해였으니 안산시 원주민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또 1986년은 한국 과학자가 처음으로 남극을 방문한 해였다. 첫 방문자는 연구소 선배인 지질학자 장순근 박사였는데 일차 답사를 하고 온 후 남극기지를 건설하기 하기 위해 준비작업까지 맡았다. 장 박사의 요청으로 약 일 년간 비공개로 준비작업을 도왔다.
   1987년 4월엔 결혼을 하였다. 결혼 직후 3개월간 서초동의 전셋집에서 부모님과 생활한 후에 8월에 안산으로 이사를 했다. 전제 분양을 받아 가능했다. 이 해에는 출장도 많았고 일도 꽤 늘었다. 남극기지 건립과 일차 동계대 연구 준비까지 별도로 시간을 내서 일과 후나 휴일에 해야 했다. 그리고 석사를 마친 후에 미루어두었던 박사과정 진학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다행히 연애하던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안산에서 출퇴근하게 되어 시간 절약은 많이 되었다. 남극 일은 생물학자들이 머물면서 할 일과 1년간 사용할 장비와 실험실 준비 그리고 대원들이 입을 옷 특히 잠수복 등등을 챙겼다. 다른 나라 남극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는 일에도 시간을 많이 뺏겼다. 우리보다 먼저 기지를 만든 중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자료들을 많이 보았는데 다 장 박사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1985년에 석사학위를 마치고 그다음 해에 서울대학교 동물학과에 입학시험을 쳤으나 보기 좋게 낙방하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유학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려면 남극을 가서 1년을 보내고 바로 외국으로 바로 가야 하는데 해양연구 주제 지역을 ‘한국 연안’으로 하고 싶어서 갈등이 많았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국내연구를 포기하고 남극연구를 하는 것과 동시에 남극 1년 파견에 관한 생각을 말하였다. 반대를 분명히 해서 더 고민이 되었다. 몇 날 밤을 잠 못 이루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대학교 해양학과 고철환 교수(현 성신학원 이사장)가 필자의 연구실을 방문해서 해양학과 저서생물연구실로 진학을 권유하였다. 결국, 서울대학교 재도전과 국내 연안연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연구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하게 된 시점이었다. 남극 1차 동계대의 준비는 다 하였으나 극지연구소 창립 연구원으로는 결국 참여하지 않았다.

연구소에 근무하고 결혼 생활을 하면서 여러 신문을 접하게 되어 다양한 주제를 철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정리되어 남아있는 주제가 바다와 환경 분야였다(사진의 자료는 1990년 신문자료임).

 1987년 가을에는 퇴근 버스와 전철을 바꾸어 타고 서울 영어학원에 다녔다.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탓에 늘 영어 실력 부족에서 한계 느꼈었다. 버스와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계속 책을 읽었다. 공부가 지겨우면 신문을 사서 전부 다 읽었다. 아니면 무엇이라도 인쇄물이라면 무엇이든 읽어야 장시간 이동의 지겨움도 덜었다. 서서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습관은 식탁에서도 화장실에서도 그대로여서 집에서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 “제발 식사할 때만이라도 식사에 집중해요.”라는 말을 거의 매일 들었다. 주로 신문과 전공 서적이었다. 신문은 다음에 또 보고 싶거나 나중에 자료가 될 만하면 스크랩하였다. 그러니 집안 곳곳에 신문이 쌓였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에서 비듬이 생기고, 원형탈모증까지 아니더라도 머리가 눈에 띄게 빠졌다. 약국에 갔더니 버스나 전철에서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이었다. 조명이 일정하지 않은 움직이는 곳에서 책을 읽으면 긴장이 되어서 두피가 마르게 되며 그러면 차츰 머리도 빠질 수 있다는 진단이었다. 그 습관을 고쳤지만, 아직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다. 이젠, 식탁에서는 읽지 않는다. 예왼 늘 있었다. 그 자료들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어떤 신문자료는 삭아서 조각이 나고, 또 어떤 것은 잘 남아있으나 내가 왜 이런 자료까지 모았지 하면서 버린 것들도 많다. 물론 지금까지 이 자료들을 다시 읽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가끔 쌓여있는 자료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한 번은 쓰일 때가 있을 것이라는 자기 위안을 하기도 한다.
   1988년 3월엔 해양학과에 입학하였다. 4월엔 첫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해 말에 전세 분양으로 살던 아파트를 빚을 내더라도 사기로 했다. 그 빚을 다 갚는데 꼬막 10년이 걸렸다. 어쨌든 1988년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 때문에 지금도 딸을 복덩어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집은 4월이 축제의 달이기도 하다. 한 해 4월에 사람을 만났고, 그다음 해 4월에 결혼하고, 또 그 한 해 뒤 4월에 예쁜 딸을 낳았으니 말이다. 이 딸도 책 읽기를 좋아하고, 지금은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안산신문  ansansm.co.kr

<저작권자 © 안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산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