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동화작가>

겨울이 깊어지고 있다. 며칠 따스한 날씨를 보이더니 다시 겨울답게 추워지기 시작했다. 일교차가 심하다. 저녁나절 바람이라도 불기 시작하면, 밤새 기온이 뚝 떨어진다. 독감과 감기가 기승을 부리는 철이다. 게다가 올겨울도 코로나 19로 힘들게 겨울나기를 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k방역을 자화자찬하던 입들은 죄다 숨어버리고, 섣부른 위드코로나로 방역당국은 휘청거리고 있다. 확진자 수가 매일 경신을 거듭하고 사망자도 급증하고 있다. 병상도 모자라 흉흉한 괴담까지 퍼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달 28일에는 국내 첫 오미크론 확진 판정자까지 나왔다. 안산에서도 한 중학생이 확진 판정을 받고 관련된 중학교는 15일까지 전 학년 원격수업으로 전환했다. 오미크론 공포가 전국으로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 이래저래 올겨울도 국민의 화병(火病)은 대선판의 막말과 함께 사그라들 틈이 보이질 않는다. 외출도 두렵다. 둘레길만 애꿎게 돌고 있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 10여㎞의 숲속 둘레길이 있다. 코로나로 인해 숲속 둘레길을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 이제는 구석구석 환하다. 계곡에는 많은 물은 아니지만, 가뭄에도 흘러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벌써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애기나리가 피어있던 곳, 물봉선화가 올망졸망 피어있던 곳, 다래를 조랑조랑 달고 있는 다래나무 숲, 고마리, 며느리밥풀꽃, 구슬붕이꽃, 물레나물꽃…. 이젠 녀석들이 어디 살고 있는지까지 환할 정도이다.
언뜻 보면 즐비한 나목들로 춥고 쓸쓸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숲길이다. 그러나 숲길에 들어서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나목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보인다. 지난 계절 동안 할 일 다 하고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 자신이 왜소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숲길엔 벤치 대신 개인이 갖다 놓은 의자 몇 개도 있다. 정형화된 벤치보다 훨씬 정감이 간다. 이 의자에 앉았던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떨구고 갔을까? 슬그머니 의자에 앉으면 많은 이야기가 재잘대며 피어오른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웃을 수 있는 숲길이 자꾸만 좋아진다.
숲길엔 오르막 내리막길이 있기 마련이다. 낙엽이 쌓인 좁은 숲길에 싸리비가 하나 서 있다. 낙엽 아래 혹시 숨어있을지 모를 얼음길에 조심하라고 갖다 놓은 싸리비이다. 싸리비를 갖다 놓은 사람도 그렇지만, 걷기 편하도록 쓴 흔적을 보면 절로 고맙다라는 말이 새어 나온다. 가슴에 질화로 하나가 들어있는 느낌이다.
깊은 산, 키 큰 나무 우듬지에 새 둥지처럼 붙어있는 겨우살이 모습도 볼 수 있다. 겨우살이 위의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보는 것도 큰 선물이다. 발걸음이 절로 멈추어진다. 서양에서는 겨우살이를 ‘소원 들어주는 나무’라고 부른다. 문간에 겨우살이를 걸어놓고, 그 아래를 지나다니면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또 연인들이 이 겨우살이 아래에서 입맞춤하면 결혼이 성사된다는 풍습도 있다. 우리나라도 역병이 돌 때, 문밖에 겨우살이를 걸어 놓으면 역병이 무서워 피해간다고 믿기까지 했다.
숲길엔 소나무 숲, 잣나무 숲, 낙엽송 숲, 참나무 숲, 잡목 숲이 번갈아 있어 걷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숲길을 걸을 때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제각기 다르다. 잡목 숲길의 낙엽 밟는 소리가 제일 아름답게 들린다. 유치원 교실처럼 왁자그르르 쉴 새 없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나무 숲 잣나무 숲과 낙엽송 숲길은 부드럽지만, 밟히는 낙엽 소리가 너무 고요하여 적막함마저 느낀다.
젊었을 때의 숲길과 지금의 숲길에서 전혀 다른 자화상을 만난다. 나이가 점점 들면서부터 낙엽에 이입되는 감정이 자꾸만 지나온 길을 반추하게 만든다.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라는 물음표가 자꾸 생긴다. 그런 생각은 숲길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붙든다. 부질없는 상념들이 가슴 가득 차오른다. 지난 계절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침잠 속으로 빠져드는 나무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바람이 분다. 마른 나뭇잎들이 문풍지 소리를 내며 흔들리다 이내 떨어진다. 할 일 모두 마치고 낙엽이 되는 나뭇잎들을 보며 삶의 진한 감정까지 느낀다. 푸른 하늘로 자꾸 눈길이 간다. 지나온 삶의 역정 같은 숲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겨울 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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