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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그곳
  • 안산신문
  • 승인 2022.07.1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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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소설가>

 지난봄, 지인이 이끄는 대로 우연히 강화도 선원사라는 절을 가게 되었다. 지인은 선원사 주지 스님과도 친교가 있어서 차를 대접받고 스님과 간단한 대화도 나누었다. 스님은 연꽃으로 만든 음식에도 해박하여 책도 저술하셨다며, 연꽃차를 주셨다. 강화도는 자주 갔지만 선원사는 처음인 듯했다. 절에는 외양간이 있어 소를 키우고 있는데, 이 소가 여물을 먹거나 할 때 불경 읽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 TV에도 소개되었다고 한다. 나는 입구에 있는 박물관에 더 관심이 갔다. 팔만대장경을 처음 만들었다는 절이 선원사라 하여, 아직도 유물이 나온다고 하였다.
 40년 전에 만난 선원사지는 지금과 매우 달랐다. 너무 달라서 처음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선원사 본당은 없고 절터만 있다. 대학 1학년 때였다. 잡지에 실린 강화도 초지진의 사진을 선배는 손끝으로 가리켰다.
 “여기로 가자”
 우리는 흥분했다. 80년대 초반 당시의 교통상황이나 여행길은 그리 간단한 여정이 아니었다. 갑자기 결성된 10명의 여행단은 야간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물론 누군가 기타를 들고 갔었나?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추위였다. 매운 추위가 움츠러들게 하였다.
 전등사 입구에서 잔 여관에서는 장작불로 방을 데워서 초저녁에 뜨거워서 새벽엔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전등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전등사는 병인양요 때 치열하게 대항하여 이겨낸 곳이다.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창건 시 도편수가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나신으로 조각해 처마를 이고 있게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신성한 절에 더구나 그런 조각상이 있다는 것에 우리는 놀랐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으로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우리는 고려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선원사지에 들렀다. 절은 현재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의 제조한 곳이라 하여 찾아갔으나 사적 제259 호 강화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란 간판만 있었고 절을 상징하는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차편도 없고 주변에 아무 시설도 없고, 빈 절터에 얼마나 실망했는지. 그래도 우리는 절터에 앉아 과자를 먹고 게임을 하고 신나게 놀았다. 누가 깨진 기왓장 아래에서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무당이 굿을 하고 저주를 써 놓은 글이었다. 어렸던 우리는 기겁을 하고 그곳에서 달아났다.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1245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창건한 곳이다.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의 격을 갖고,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조각,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때 조각된 팔만대장경 목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선원사는 순천 송광사와 함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혔으나 1398년,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그 터는 잊혀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곳에 오니 새삼 더욱 그리워진다. 천 년 전 조상들의 손끝 여문 손길 위에 대장경을 새기며 호국의 염원을 기원하며, 몽골에 대항했던 고려군의 전투와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러낸 조선 후기나 현세나 침략에 고단했던 가슴 아픈 우리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또 그것을 함께 느꼈던 40년 전 함께 했던 친구들. 지금의 나. 시간은 또 이렇게 흘러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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