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의인생상담]할머니

사려니<부부상담사>

이번 추석 연휴의 어느 하루였다. 우리 부부는 언니, 동생네와 함께 수리산 자락을 걷고 있었다. 떨어진 밤송이가 제법 눈에 띄였다. 여물지 않은 밤이 바짝 마른 채로 들어 있었다. 도토리는 다람쥐가 주워갔는지 사람이 주워갔는지 수량이 적었다. 나무 막대기를 하나씩 주워 스틱 삼은 우리는 한가로웠다. 어차피 빨리 갈 수도 없었고 멀리 갈 수도 없었다. 형부가 무릎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40분 남짓 걸었을 때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이 나타났다. 우리는 주저 없이 발길을 돌려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편안한 옷에 운동화 차림이었고 스틱을 쥐고 있었다. 성성한 백발의 할머니는 매우 빠르게 걸었다. 그래서 휘청거리기까지 하였다. “ 우리보다 훨씬 빠르네” 형부가 감탄을 하였다. 언니가 할머니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앞으로 갔다. 조금 뒤 언니가 고개를 돌려 큰소리로 할머니에게서 얻은 정보를 우리에게 전했다. 할머니는 92세이고 일행을 놓쳤다고 했다. 나는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이 할머니 치매구나, 하고 생각했다. 함께 산에 오른 92세 할머니를 놓치는 일행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 일행의 눈은 오직 할머니에게 머물러 있었을 게 아닌가?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할머니 때문에 우리의 산행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밤도 도토리도 군대에 간 조카도 더는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오직 그 할머니가 왜 산에 혼자 남겨졌는지에 대한 추리만이 무성했다. 내가 마련한 특별 산행 이벤트가 망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대화를 오래 이어가는 언니도 못마땅했다. 어차피 치매 할머니와의 그 대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쉼터용 정자가 나타나자 나는 준비한 간식을 풀었다. 먼저 물을 건넸으나 할머니는 손을 내저었다. 포도마저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사과 한 조각을 받아 들었다. 할머니는 나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할머니는 자신이 말한 그 ‘일행’에 대해 부연하였다. 그들은 산 입구에서 만난 사람들로 할머니가 동반 산행을 요청하자 ‘그러시든지요’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이라면 아무 책임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정자에서 나누는 대화를 듣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언니와 차에 탔다. 먼저 출발한 남편이 전화를 걸어와 대야미 역에 내려드리라고 했다. 언니도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댁이 그 근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를 가까운 파출소로 모셔다 한다고 주장했다. 할머니는 혼자 살며 지갑도 없고 휴대폰도 없었다. 할머니가 치매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파출소는 대야미 방향이었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15분 정도 갔을 때 할머니가 ‘여기 내가 사는 동네인데’라고 말하였다. 조금 뒤 우리 오른쪽으로 아파트가 나타났을 때는 ‘저기 101동이 우리집이야 ’라고 했다. 나는 근처에 차를 세웠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차를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비상등을 켰고 언니는 내려서 문을 열고 대기하였다. 나는 운전석에서 고개를 돌려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였다. 연신 고맙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은 형형하였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당신을 치매 환자로 여겼음을 그 할머니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할머니는 차들이 빵빵거리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꽤 오래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외로운 할머니였고 나는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은 사람이었다.

안산신문 ansan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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