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동화작가>

설악산에서 시작한 단풍이 빠르게 남하하고 있다. 단풍으로 유명한 산은 휴일만 되면, 도로마다 정체와 지체가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고잔역 뒤, 옛 고잔역으로도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이곳은 눈으로 체감하는 가을보다 가슴으로 더 체감하게 되는 매혹적인 역이다. 가만히 있어도 눈에서 가슴으로 전이되는 수채화 같은 역이다.
전철 4호선 고잔역 뒤쪽으로 내리면 탄성부터 나온다. 교각 아래, 그 옛날 수인선 협궤열차의 추억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사진과 글을 읽는 재미로도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게다가 협궤철길을 따라 코스모스 꽃길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가을비 몇 차례 지나간 뒤, 코스모스 꽃길이 처연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흔들리는 코스모스꽃들을 보면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코스모스 꽃 사이로 햇살이 투명하게 부서질 때도 그런 마음이다. 날마다 무디어져 가는 고추잠자리와 나비들의 날갯짓은 더욱 애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시민들의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도 잦은 느낌이다. 고잔역엔 포토존이 있지만, 발길 머무는 곳마다 포토존이다.
철로의 침목을 따라 보폭을 바꾸며 걷는 연인의 모습이 아름답다.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웃음소리가 코스모스 꽃길에 퍼지면 더욱 매혹적이다. 무궁화호 객차로 만든 카페 열차도 마찬가지이다. 카페 열차 안의 진한 커피 향조차 애잔한 가을 냄새이다. 열차 뒤 물들어가는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에게 가을! 소리치면 깜짝 놀라 그 넓은 잎을 우수수 떨어뜨릴 것만 같다. 동화 속의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옛 고잔역 모습은 보이는 곳마다 그림엽서로 가슴에 들어온다.
옛 고잔역의 백미는 작은 옛 이정표이다. 고잔역을 나타내는 옛 이정표는 수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다. 이 역 일대는 갯벌이 가득한 해안가 지역으로 곶의 안쪽이라는 이름의 ‘곶안’ 혹은 ‘고지안’이었다. 이것을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음차하여 古棧 즉, 고잔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옛 이 역은 수인선 협궤열차가 달리던 곳이다. 수원과 인천 송도 사이를 오갔던 협궤열차. 1937년 일제가 수탈한 쌀을 가져가기 위해 개통한 뒤, 반세기 넘게 수원과 인천 송도 사이를 오갔던 협궤열차이다. 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열차이기도 하다.
이 열차를 처음 타본 때가 1990년도로 기억된다. 경기도로 교직을 옮긴 뒤, 첫 부임지가 안산이었다. 사리 포구로 고깃배가 오가고, 고잔역을 통과하던 협궤열차. 아직도 그 아름다운 추억들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안산으로의 배정은 행운이었다.
협궤열차는 트럭과 부딪치면 전복되기도 해 꼬마열차라는 애칭까지 갖고 있을 정도였다. 열차에 오르면, 사리나 송도 포구에서 나온 생선과 젓갈을 실어나르던 아낙들의 모습이 지금도 빛바랜 사진으로 살아나오고 있다. 열차 속의 그 비릿한 바다 냄새를 아직도 바람 속에 맡을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협궤열차가 마지막 운행을 한 것은 1995년 12월 마지막 날이었다. 그 후, 고잔역 주변은 빠르게 옛 고잔역의 모습을 탈피하며 발전을 거듭했다. 안산시는 지속적으로 추억 속 협궤열차를 되살려 시민들에게 추억과 느림의 미학을 제공하여 왔다. 앞으로도 이 사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철도박물관에 있는 협궤열차를 이곳에다 옮길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관광 효과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엔 수많은 예산과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겠지만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사업이기도 하다.
유난히 붉은 놀, 까치놀이 내리는 저녁. 고잔역 협궤철도를 걸으면 보이는 곳마다 몽환적 분위기로 바뀔 때가 있다. 멀리서 협궤열차의 애잔한 기적소리가 들려오고, 역무원이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환상처럼 눈앞으로 다가온다. 해산물 가득한 바구니를 안고 열차에 오르는 아낙의 웃음소리와 비좁은 열차 속 가득한 삶의 냄새. 세상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열차가 어디 있으랴. 그럴 때면 카페 열차마저도 협궤열차로 탈바꿈하여 달릴 것 같은 몽환적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이처럼 아름다운 옛 고잔역으로 가을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고개 숙인 코스모스들과 낙엽으로 뒹구는 플라타너스 잎들로 마음마저 늦가을 빛으로 채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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