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어느 오후, 난 여고 동창 A와 공부를 무척 잘했던 두 친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A는 아직도 그들과 드문드문 인연을 이어가는 모양이었다. 그 친구들은 어릴 때처럼 학교 밖에서도 승승장구 빛나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그녀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남자였다. 그들에게도 몇 번이나 사랑 비슷한 것이 다가와 어슬렁댄 적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들은 잡힐 듯 말 듯 바로 눈앞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그녀들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 없듯이 /스치듯 안녕‘이었다. A는 이야기를 마치며 나름의 통찰을 담긴 한 마디를 내게 남겼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미친 척하면 되었는데.” 저 남자도 나를 좋아하나? 나만 좋아하는 거면 어떻게 하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제 모습이 망가질 것이 두려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제 먼 곳에 사는 딸이 전화를 했다. 도란도란 딸과 얘기하는 남편을 보자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가 딸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사랑한다고 해 봐“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는 이리저리 피하다가 황급히 딸에게 작별을 고하고 말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25년 넘게 한집에 살면서 그가 내게 그 말을 한 것은 네 번 아니면 다섯 번 정도였다. 넉넉잡아 다섯 번으로 친다면 5년에 한 번 그 말을 한 셈이다.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이다.  
우리는 제 속을 드러내는 감정 표현에 너무나 서툴다. 남이 자기에게 스스럼없이 표현을 해주면 좋아하면서도 그것을 되돌려주는 걸 부끄러워한다. 신체적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가 억압되는 후진 나라일수록 말과 감정이 억압된다. 그런 곳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왜 ’사랑해‘라는 말에 이렇듯 편치 않은 것일까? 최근의 참사처럼 예기치 않은 이별을 한 사람들은 떠난 사람을 향해 생전에 ’사랑해‘라고 말해주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 그렇게 후회할 거면서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인색할까? 이런 의문을 푸는 일에 무슨 거창한 문화적 고찰이 필요하지는 않다. 바로 내 경우에 힌트가 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었을 때 그때 내 눈앞에는 남편이 있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는 기억에 없다. 단지 그 말을 들은 대상과 그 말을 던지기 전과 후의 내 느낌만을 기억할 뿐이다. 난 그때 조금 부끄러웠다. 상대에게 왠지 지는 거라는 느낌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더 좋아하는 거야, 라고 고백하는 셈이니 그랬다. 막상 그 말을 내뱉고 나서는 속이 다 후련하였다. 난 ’망가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찬 밀폐 용기에 갇혀 있다가 대기 중으로 해방된 공기였다. ’딱 한 번 미친 척‘ 하기 위해 조금 망가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대기로 흩어져버린 그 공기를 찾아 다시 밀폐 용기에 담을 수는 없다. 한 번 해방된 말은 다시 입에 갇히지 않는다. 그 후로 나는 밥 먹듯 ’사랑해‘라는 말을 달고 산다. 우리집에서 ’사랑해‘를 수시로 쓰는 나는 약간 고독하다.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은 이 말에 대한 피드백에 아주 인색하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남편은 대체로 말이 없다. 가볍게 내 어깨를 치거나 슬쩍 얼굴을 만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는 아직 망가질 용기가 없다. 내가 아들에게 ’이 말을 하면 아들은 항상 ’나두‘라고 답한다. 가족 가운데 가장 용기 있는 셈이지만 아직 제대로 망가지지 않았다. 내가 딸에게 ’사랑해‘라고 말을 하면 딸은 대체로 회피한다. 낮게 뭐라 웅얼대면서 화제를 돌려 버린다. 망가짐을 향해 가장 먼 길을 가야 할 대상이다.
거리의 은행잎이 아름답게 물들었다. 사랑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각자의 입에 갇힌 ’사랑해‘라는 말을 해방시키자. 이 말을 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딱 한 번 미쳐‘버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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