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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인생은 잘 삭힌 식혜처럼
  • 안산신문
  • 승인 2024.06.0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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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웅<수필가>

요즘은 식혜를 굳이 집에서 만들지 않아도 마트나 방앗간에 가면 다양하게 제조하여 판매하는 것이 있어 쉽게 구입해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집에서 정성스레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표 식혜의 뽀얀 자태와 맛을 따라 갈 수가 없다.
옛날 시골에서는 보리에 싹을 틔어 잘 말려서 엿기름을 만들었다. 식혜를 만들려면 엿기름을 따뜻한 물에 불려서 건더기를 걸러내고 물은 녹말을 가라앉혀서 맑은 윗물만 따라낸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고두밥과 잘 섞어 온도를 맞춰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삭은 밥알이 대여섯 개 물위로 동동 떠오를 때까지 재운다. 다 삭았다 싶으면 솥에 옮겨서 설탕이나 꿀을 넣어 간을 맞춰 한소끔 끓여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다. 이때 시간이 넘어버리면 시어져서 시큼한 맛이 나서 못 먹게 되니 여간 정성이 드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전기밥솥의 보온 기능으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어서 5~6시간 지난 후 끓이면 되니 수고로움을 덜 수 있어도 집에서 번거롭게 해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이처럼 잘 발효된 상태를 뜻하는 ‘삭다’의 사동형은 ‘삭이다’아 ‘삭히다’의 두가지가 있다. 발효하여 맛이 들게 할 때는 ‘삭히다’를 화를 가라앉힐 때는 ‘삭이다’를 쓴다. 어쩌면 화를 꾹꾹 눌러 삭이는 것은 밥알이 떠오르기 전 식혜를 보온하는 것이나 생선에 소금을 쳐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아 젓갈이 되도록 오랜 시간 삭히는 것과 비슷한 과정일지 모른다. 잘 삭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적절한 해소처리와 보살핌이 필요하다. 흔히 부패와 발효는 한 끗 차이라고 한다. 잘삭힌 식혜는 별미지만 시간을 넘겨 시큼하게 변한 죽은 버려야 하는 음식물 쓰레기가 된다.
사람들의 성향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혈기왕성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젊은 시절에는 누가 내게 부당한 대우를 하면 참지 못하고 기어이 바로 잡으려 덤비고, 따지는 것이 옳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어른들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끔찍한 살상 소식이 들려오는 뉴스를 보며 그들도 그 뻣뻣한 감정을 삭이고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쳤다면 좀 더 순화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해본다. 거칠고 뻣뻣한 것을 부드럽게 하는 일은 시간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인위적으로 하려면 엿기름 역할을 하는 많은 수양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젊었을 때는 화를 삭이려면 몇날 며칠을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씨름해야 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이 나이가 되니 웬만한 일은 이해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고 그러니 화낼 일도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가끔 눈에 거슬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잔소리를 하게 되니 아직도 더 많은 수양이 필요한 것 같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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