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의 인생상담]전철에서 생긴 일

사려니<부부상담사>

전시회에 가려고 친구와 서울로 향했다. 전철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앉아서 가고 싶었다. 차량의 문이 열리자 여느 아줌마들처럼 재빨리 빈 좌석을 찾았다. 운 좋게도 둘 다 좌석을 차지했다. 얼마나 갔을까, 친구 옆에 좌석 하나가 났다. 친구는 거기로 옮겨 앉았다. 그러면서 나보고는 자기가 앉았던 자리로 옮기라 했다. 알고 보니 내가 앉은 자리는 임산부 좌석이었다.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좌석 밑을 보니 분홍색 라인이 표시되어 있었다. 친구는알고 있었다고 했다. 잠시 앉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는 길에 우리는 둘 다 기진맥진이었다. 일정에 없던 자수 전시회를 하나 더 보았기 때문이다. 서울 간 김에 하나 더 보자고 욕심을 낸 게 무리였다. 우리 둘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많이 걸은 탓에 다리가 아팠다. 내가 먼저 아프다 했고 친구도 조금 뒤 장딴지가 당긴다고 했다. 자수 전시회가 열린 칠월의 덕수궁은 눈이 부셨다. 더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활짝 핀 능소화가 자꾸 눈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접었다. 퇴근 시간을 피하는게 더 급선무였다.
서두른 보람도 없이 전철 안은 벌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손수건이라도 깔고 앉을까, 했지만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우리는 출입문 옆의 기둥을 잡고 섰다.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기둥 바로 옆에 자리가 났다. 친구가 잽싸게 나를 그 자리로 밀어 넣었다. 내가 양보하려고 해도 친구는 한사코 내 어깨를 눌러 주저앉혔다. 나는 몇 정거장 가서 교대해야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날따라 그녀는 집요하게 자기 남편 이야기를 했다. 늘하던 이야기였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었다. 꽤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쪽에 선 중년의 남자가 자꾸 나를 흘끔거렸다. 흔히 (?) 있는 일이라 모른척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그 남자는 이제 곁에 선 여자 하나까지 끌어들여 나를 보았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그 순간 여자가 우리에게 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는 귀가 밝았다. 친구는 말을 듣자마자 내 손을 잡아당겼다. 야, 여기 임산부 좌석이래.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튕겨 올랐다. 누군가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임산부였다.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다. 여자는 왜 자리를 비켜달라, 하지 않았을까? 비워둬야 할 자리에 앉은 사람이라면 자리도 양보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걸까? 나는 혼비백산하여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해요. 정말 몰랐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전광판을 보았는데 금정역이었다. 내려야 할 곳이었다. 내려. 친구는 놀라 돌아서다가 어떤 사람의 팔목을 쳐 버렸다. 그 사람은 핸드폰을 손에서 놓쳤다가 가까스로 붙잡았다. 나는 또 죄송해요, 외쳐야 했다. 우리는 닫히기 직전의 문을 겨우 빠져나왔다.
집에 와서도 부끄러웠다. 임산부 좌석임을 알았다면 나는 처음부터 자리를 비웠을 거였다. 내가 그 임산부에게 몰랐어요, 라고 한 건 그녀를 몰라보았다는 게 아니었다. 그 자리가 임산부 좌석이라는 걸 몰랐다는 거였다.
누가 봐도 임산부 좌석임을 쉽게 알게 해야 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데 표시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아예 좌석 등받이에 분홍색을 칠해 놓으면 그건 누가 봐도 명명백백하지 않을까?.
해서 찾아보니 좌석 등받이에 색을 칠한 열차가 있다. 적어도 내가 이용한 4호선과 1호선의 어느 열차는 아직도 디자인을 바꾸지 않았다.
때로는 선의가 있어도 자기도 모르게 그 선의를 배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줄이려면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앞으로는 꼭 임산부 좌석인지를 먼저 확인하리라, 맹세한다.

안산신문 ansansm.co.kr

트윗하기

안산신문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