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영구차가 성당을 뒤로 하고 일로 달려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천주교인 공동묘원에 이르렀을때, 앞차들이 막혀 비로소 전방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입구에 큼직하고도 선명하게 격문같은 글귀 하나가 정통으로 내 안구를 찌르는 것이었다. 순간 섬찍하여 멈칫했던 그 기억이 되살아 났음이다.
<내일은 너의 차례>
물론 내일은 너의 차례가 될지 모르니 오늘 亡人을 잘 모시라는 뜻 이겠으나, 다시 생각하니 ‘너는 내일 죽을 준비가 되었느냐?’는 뜻이 더 강학 와 닿는 것이었다.
자고로 개관사정(蓋棺事定 : 시체를 관에 넣고 뚜껑을 덮은 후에야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의 가치가 판명된다)이라 했으니 머잖아 내려질 너의 평가를 미리 점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어찌 섬찍하고 멈칫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로부터 장장 40년이 더 흐른 오늘 아찔한 84층 계단에서 모처럼 나 자신을 샅샅이 점검해 본다. 솔직은 積金은 고사하고 積心한 것도 별로이니 積善한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짚어지지 않으니 이를 어쩐담. 한번도 죽음이 나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으면서 나는 왜 이 모양 요꼴로 오늘에 이르렀단 말인가.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습니다’가 진정 맞는 말이었구나. 이제야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자작 묘비명에 전적으로 공감하다니 이 또한 늦었도다.
이런 내 주제에 올해 치러질 大選(대선)과 문단의 선거를 두루 바라보면서 그 난타전이 하도 가관이라 은근히 한데 묶어 난도질이나 해보고픈 충동이 발동한다. 이런 충동 스스로 괘씸하게 생각하면서 문제는 난데없이불거지는 라이벌의 취약점 선전이라 할 것이다. 선거인의 알 권리 충족에 도움이 되어 가상하지만, 그 출처와 동기에 구린내가 나서 좀 고약하다.
흔히 논문표절이니 축재, 여자문제 등이 발목을 잡는 것 같은데, 긴 얘기는 접고 여자문제를 다룸에 있어선 본받을만한 일본인들의 미담하나가 떠오른다.
知韓派(지한파)이기도 했던 기시 노부스께(岸信介)는 태평양 전쟁때 42세에 상공부장관을 지낸 인물로서, 전후 정계에 복귀하여 총리대신 되어 세계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낱알 다이아몬드 40여개를 구입해 와서 자기와 인연이 있었던 여인들에게 선물한 것이 의회에서 야당이 크게 문제삼자, 언론이 ‘의회에서 배꼽밑 이야기로 야단법석을 피우려는 추잡한 놈들’이라 듣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흐지부지 되었다는 일화는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하지 않는가?
그가 80을 넘은 나이에 오랫동안 물심으로 자기를 도우다 죽은 요정의 여주인의 영정을 가슴에 안고 당당히 장례행렬의 맨앞에 섰던 모습의 특단 기사는 전 일본여성을 울렸다지 않았던가. 진정 멋쟁이의 진면목이라 할것이다.
여기서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잣대에 익숙해 있는 자들에게 진정으로 고언 하나, “정직하게 대답하라”그대 영혼은 몇점인가?
문득 가마득한 장택상씨의 초대 외무장관 퇴임사가 생각나서 씁쓰레하다. 그는 장관실에 국장과 과장들만 참석케 하고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산 사람은 극진히 대접하지만, 죽으면 갖은 욕설을 퍼붓고 매질하는 관습이 있었답니다. 오늘 퇴임하는 장택상은 죽은 몸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우리의 현실을 예견이라도 한 것 같아 숙연해진다. 욕을 퍼부으려면 내 입이 먼저 더러워져야 한다는 경고였던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출마하려는 위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진실된 면모를 보여달라는 그것 하나뿐, 진실이란 가면을 훌렁 벗어던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포장이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색으로 덧칠되어 타인의 시선에 좋은 영상으로 남는 것이지만 위장과는 전혀 다르다. 위장은 거짓이다.
물위의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물밑에서 갈퀴를 부단히 움직이는 백조처럼 자신을 채근해온 위인이 출마하길 원하다. 실증도 없는 업적이 급조된 인물의 출현이 달갑잖으며 경계한다는 뜻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문단의 경우 글로서 자기를 재지 않고, 문단감투로 세력을 만들어 거들먹거리려는 것은 청빈의 선비정신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하겠다. 그러니 그런 부류들은 썩 꺼졌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에 작고한 김진태시가 ‘隨筆은 隨筆이어야 한다. 隨子가 꼭 쓰고 싶으면 隨苾(수필)로 쓰면 될 것이다. 苾子는 향기로 울 필자다. 향기가 없으면 수필이 쓰여지지 않는다. 修字(수자)는 닦는다는 뜻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생각없이는 수필 한편을 쓸 수도 없고 써서도 안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심히 부끄러워 좀처럼 고개가 쳐들어지지 않는다. 문학의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교과서라 할 것이다.
라이벌의 본래 어원은 ‘강물의 이쪽과 저쪽에 살면서 같은 강물을 마시는 사람들’이란다. 결코 敵(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랴.
출마하려는 자들이여, 필히 명심할지어다. 40년 묵은 내 기억이 난데없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듯이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이리니 못된 생각, 못된 짓거릴랑 당장 그만 그치라구요. 개구리 올챙일 적을 잊어선 안되며, 메아리가 외친대로 되돌아도던 일을 가슴에서 종치듯 울려야 하리라. 이왕이면 “나 너를 사랑한다”고 마음껏 크게 외치면 어떨꼬?
다시금 ‘내일은 너의 차례!’를 새김질 한다.
/이기진 논설주간
안산신문 webmaster@ansansm.co.kr
<저작권자 © 안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