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화가 유재명. 8개월전 폐암을 선고 받고도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죽음의 공포가 아무리 그를 괴롭혀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잠재울 수 없다. 병마와 싸우는 오늘도 그는 붓을 잡는다.

◆ 힘든 투병생활에도 웃음 잃지 않아

독특한 화법과 표현으로 이미 여러 미술 애호가들에게 촉망받고 있는 서양화가 유재명(47) 씨가 암과 싸우면서도 작품활동과 전시회를 계속하고 있어 주변의 격려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사고 있다.  8개월 전 폐암 판정을 받고 부쩍 말라 버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는 오늘도 붓을 놓지 않고 있다. 그를 버틸 수 있게 한 건 그림에 대한 열정과 사람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한 때 어깨까지 치렁치렁 내려왔던 머리카락이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듬성듬성 빠지자 그는 얼마 전 머리를 아예 삭발했다. 수줍게 눌러 쓴 모자 밑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초췌하지만 입가의 밝은 미소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아픈 이후 달라진 점이라면 사람이 그리울 때가 많아졌다는 거예요. 하루라도 친구와 연락이 안 되면 힘들어요. 마음도 많이 약해지고…”

매일 죽음과 싸우는 그를 버티게 하는 것은 그림과 사람이다. 특히 시의원이 되기 전부터 인연을 쌓아 온 송진호 의원과는 막역한 사이다.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송 의원은 유 작가를 3년 전 한 예술인 주점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송 의원에 대한 유 작가의 고마움은 큰 듯 했다.

◆ 아플수록 더 그리워지는 게 사람

▲ 안산시의회 송진호 의원(왼쪽)와 유재명 작가는 송 의원이 시의원이 되기 전부터 막역한 사이다.

유 작가의 전시회 도록(圖錄) 첫 머리에 송진호 의원이 쓴 작품평은 인상적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삶을 원했으며 그 염원 대용으로 로봇을 그렸고, 그의 불온한 생각은 늑대와 까마귀들을 등장시켜 생명이 없는 로봇에게 그들의 피와 살을 붙여 그리움과 사람을 불어 넣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그린 것이다.”

개인적 친분을 넘어 든든한 후원자로서의 송 의원에게 유 작가는 그동안 자신이 벌였던 퍼포먼스를 통해 도록을 넣고 끓인 물에 밥을 해주는 이른바 ‘밥상 차려주기’를 건강 때문에 해주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도록으로 밥도 못 차려주고…” 그는 한동안 말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송 의원은 유 작가에 대해 “화단에서 이제 막 자기 자리를 찾았는데 몹쓸 병이 들어 더 이상 작품을 보기 어려운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한다.

유재명 작가가 15년전 처음 안산에 와서 시작한 것이 미술학원이다. 운영 실패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지만 10년간 그는 후진들을 키우며 자신의 꿈도 키웠었다. 그런 아쉬움 때문일까? 병마와 싸우기 시작한 8개월 전부터 그는 수원의 한 장애인복지관에서 지체장애아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하지만 머리를 삭발하고는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 지난 12일, 아이들에게는 말 한마디 못건네고 가르치는 일을 조용히 홀로 정리했다. “아픈 선생님의 모습을 아이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인 것 같아요.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야 말로 표현 못하죠.”

◆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창작열정

그의 남은 열정은 그림으로 승화된다. 곧 안산에서 열 전시회에서 선보일 그림도 이제 절반 이상을 그려가고 있다. 하루하루 병마와 싸우기가 버겁지만 그림을 그리면 그 순간만은 희열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어 붓을 놓을 수가 없다. “자기 삶을 일기처럼 비추는 그림은 한 마디로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아요.”

▲ 서양화가 유재명 작가의 그림 속엔 항상 로봇과 늑대, 까마귀 등이 등장한다. 이 모든 객체는 자아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림은 전시회'INTO THE HISTORY' 중.

로봇과 UFO, 늑대, 까마귀 등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은 독특하다. 그만큼 아름아름 마니아 팬도 많다. 지난달 15일부터 30일까지 부산에서 열었던 전시회 때 방명록에 남겨진 글귀가 그를 말해준다. “그리운 로봇, 많은 생각과 느낌, 새 기법으로 익을 수 있는 조형의 언어…”, “행복한 로봇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의 작품을 안산에서도 조만간 만날 수 있다. 오는 16일부터 20일까지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이야기 속으로(Into the history)'라는 주제로 '삶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전시회를 연다. 그의 작품은 아픔 속에 녹여 낸 '작가 유재명'의 삶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최영석 기자  photojk@ansan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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