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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작가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중첩이라도 되면 나도 글을 읽으며 위로를 받았고 때론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한 번도 뵌 적 없는 박완서 선생님이 늘 친정엄마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까 올 1월초 딸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들린 학교 도서관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보고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책 표지가 화사하고 발행일이 내 생일과 같아서 나를 위한 책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책을 빌리고 며칠 안 되서 매스컴을 통해 박완서 선생님의 부음소식을 듣게 되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선생님의 책이 유작이 되다니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 그리고 작가답게 참으로 멋진 제목의 유작을 남기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책 제목은 전쟁으로 잃어버린 20대의 꿈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금의 자리보다 더 아련하고 그립다는 뜻에서 쓴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또 하나의 못가본 길-죽음-을 예감하고 있음을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이다. 그 두 개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3부로 구성되어있는 이 책의 머리에서 작가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소개한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 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
1부 ‘내생의 밑줄’에서는 그녀의 소소한 일상들과 일상들 틈으로 비집고 나오는 과거의 기억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다. 제목 그대로 그녀가 살아온 시간들 중에서 의미 있었던 부분들에 밑줄을 그으며 정리하고 있다. 글을 읽다보면 그녀의 글속에 숨겨져 있었던 개인사와 인간관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학입학과 함께 시작된 6.25 전쟁이야기, 전쟁 통에 고향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온 이야기, 꿈 많은 서울대 인문대 1학년생이 집안의 가장이 되어 미군부대에 취직한 이야기, 그곳에서 박수근 화가를 만나 ‘나목’이라는 작품을 쓰게 된 이야기, 남편을 병으로 잃고 전문의 과정을 밟고 있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이야기, 그 후 방황하던 그녀를 이끌어준 박경리 작가 이야기...... 엄마가 딸아이에게 자신의 일생을 소곤소곤 이야기하듯이 써내려가고 있다.
2부 ‘책들의 오솔길’은 어느 일간지에 ‘친절한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서평이라는 표현을 극구 사양하면서 작가는 말한다. “서평도 독후감도 아닙니다. 책을 읽다가 오솔길로 새버린 이야기입니다.” 작가와 함께 오솔길로 새다보면 나도 한번 이 책 읽어봐야겠는 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떠한 책을 읽을지 몰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착한 미소로 책 한권 건네는 선생님의 손길도 느껴지고 작가의 서재를 훔쳐보는 재미도 있다. 3부 ‘그리움을 위하여’는 먼저 하늘나라로 간 지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글들이다. 김수환 추기경, 박경리 선생님, 박수근 화백과의 추억들과 그분들에 대한 감사로 마무리하고 있다. 얼마 전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를 내신 이해인 수녀님도 마지막 부분에 그리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는데 거기에 박완서 선생님의 이야기도 있다. 박경리-박완서-이해인 으로 이어지는 그리움의 고리를 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책의 본문에서 “나이 들면서 숨 가쁘게 정상으로 끌고 가는 책보다는 도중에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거느리고 있어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는 책에 더 정이 갑니다.”라고 썼다. 책을 통해 유년을 회상하고 쉬엄쉬엄 쉬어가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박완서 작가의 유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권한다.
박은희 꽃우물작은도서관 관장 sekami03@ansan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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