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다가 문화센터 강사 노릇을 하던 시절에 마트의 매대에 놓고 3000원씩 팔던 솔거나라 시리즈 몇 권을 얻었다. 사실, 나는 횡재했다고 생각했던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좋은 책이 헐값에 팔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쪽빛을 찾아서>는 내게 <희망을 찾아서>내지는 <꿈을 찾아서>라는 말로 읽힌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미친 듯이 아버지와의 투쟁을 통해서 여행을 다녔다. 거침없는 딸의 행동에 제약을 걸지 않을 대한민국 아버지는 거의 없겠지만 내 아버지는 좀 유별나게 엄격하셨다. 그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도 주말마다, 방학 때마다 돌아다닌 나도 참, 지금 생각하면, 둘 다 유별나기는 마찬가지다 싶다.
그림책은 온통 푸른빛으로 꾸며져 있다. 내가 이 푸른 빛(자세히 말하면 푸른 빛이 도는 보라색)를 무진 좋아하는 이유에서도 일순간 이 책을 집어 들게 했을 것이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가을 하늘을 보면 미친다고 했던가? 그들 나라에 가보지 않았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우리나라 하늘은 푸르고 맑고, 오묘한 구석이 있다.
그러니 그 푸르른 가을 하늘에 바람까지 솔솔 불어올라치면 가을 바람나지 않겠는가?
물쟁이 또한 하늘과 바다를 보고 ‘저렇게 맑은 푸른빛을 만들 수는 없을까’ 생각하다가 여러 곳을 찾아다니고, 책을 읽고 하면서 푸른 물감이 쪽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푸른 물감이 쪽에서 나온다는 농부의 기쁨처럼 내 책 읽기의 기원도 내 자아를 찾아가는 길찾기로서의 시작이었다.
고1여름 방학, 보충수업을 안 하겠다는 내 의견을 엄마는 욕을 해대며 말리셨지만 여고 교사이셨던 아빠는 뭐 할 건지 계획서를 제시하고 집에서도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면 그까짓 것 하지 마라 하셨다. 그래서 한 일이 ‘집안에서 선풍기 틀어 놓고 드러누워 하루 종일 책읽기’였다.
사실 계획서에 책읽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거창한 영어, 수학, 국어 공부가 들어 있었지만, 그 여름방학 동안 참고서라고는 한 줄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책으로 빠져 들게 된 이유는 아버지의 고3, 재수시절, 대학1학년까지의 두툼한 일기책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사실 내가 그리 책에 재미를 붙인 열혈 독서가는 아니었다. 그저 학교와 집을 쳇바퀴처럼 도는 성실한 학생이었을 뿐, 책으로 둘러 쌓인 지저분한 집이 싫었고, 보지도 않으면서 처분하지도 않는 옛 책도 싫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사춘기라서 그랬나, 우연한 기회에 아빠가 생일 때마다 조금씩 사다 주신 <야간 비행>, <어린 왕자>,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집>, <데미안>, <부활> 이런 류의 책을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철이 들어 바람처럼, 구름처럼 미친 듯이 독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철이란 것이 차라리 들지 않았던들 더욱 입시에 매달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살아보지 않은 것에 대한 회한이 있다. 고1, 한참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시기에 너무 늦게 바람이 난 나는 학교 공부를 등한시 하고, 책과 씨름하며 점점 나만의 세계로 빠졌기 때문에 곁에서 보는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물쟁이가 방방곡곡 쪽풀을 찾아 헤맨 것처럼, 나는 무엇을 찾아 헤매었던가? 숱한 방황의 길에서 헤메이다 돌아온 탕자처럼, 나는 책읽기에서 내 삶의 빛을 보았다. 누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혼자서 깨닫고, 배울 수 있다는 게 기쁨이었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던 그 시절의 상황에 안성마춤이었던 듯하다.
물쟁이는 쪽풀을 얻어다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마침내 쪽물을 얻어 옷감에 물을 들인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어 물이 빠지는 것을 알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잘 안다. 사람 마음이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인간인지라 조금 안다고 게을러지고, 자신을 채찍질하지 못한다.
물쟁이의 물감찾아 떠나기는 내게 새로운 느낌을 준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쪽빛의 아름다움을 어찌 가만히 앉아서 받아 먹으려 하는 사람의 그것과 견줄 수 있으랴? 자식 키우는 일이 그렇고, 어떤 일에서 일가를 이루는 일도 그러함을 새삼 느낀다.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우리 것의 소중함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해간다. 우리 것을 지켜내는 것이 우리 자손들에게 우리가 베풀 수 있는 또 하나의 선물이란 것도 깨닫고 있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그냥 우리 전통문화를 잘 소개한 책이구나 하는 느낌에서, 오늘 다시 읽으니, 또 새로운 감회가 든다. 그림책의 맛, 책의 맛을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 또한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니, 나의 길찾기는 늙어서도 계속 되리라.
어린이에게 읽히면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될 수 있겠으나, 어른에게는 자신의 길찾기로서의 책이 될 수 있는 그림책의 미묘한 자리바꿈이 나로 하여금 자꾸 그림책으로 빠져들게 한다.
최영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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