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풀코스에 참가하는 나에게 아내는 걱정 반을 담아 '제발 무리하지 말아요'라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지난 해 에는 처녀출전의 두려움을 연습으로 이겨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장거리 훈련을 하지 않았고 그까이꺼 하면서 자주 음주를 하였던 것을 아내는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날 경기장 인근 강촌에서 휴식을 취하고 경기장에 들어 선 16명 건각들 중 처음 풀코스에 도전하는 8명은 지난 해 내가 경험했던 것처럼 가슴이 두근 반 거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21,000여명의 출전자와 가족들이 스탠드를 가득채운 춘천종합운동장은 흥분과 열기가 흐르고 있었다. 안산시청 마라톤 동호회 파이팅을 외치며 배정된 그룹으로 향하며 우리는 완주의 악수를 나누었다.
출발 신호와 함께 내가 속한 H그룹은 의암댐으로 내달렸고 오늘 아침 대관령이 영하3℃를 기록했다는 서늘한 날씨는 이내 시원함을 느끼게 하였다. 지난 해 와같이 의암댐에서는 환성 파도타기가 일고 있었다.
산색이 아름다운 삼각산을 바라보며 달리던 발걸음은 어느새 4시간대 최영신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하고 있었다. 오늘도 성어촌 주민들은 플라스틱물통을 장구삼아 온 가족이 열렬한 응원을 하고 있다. 흘끗거리고 일별하는 도시지역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곳 주민들은 출전자들과 함께 마라톤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하였기 때문일까, 힘들이지 않고 10km를 달려 온 기록은 지난 해 보다 5분 빨랐다. 이렇게 간다면 4시간 이내? 나는 나 자신에게 물으며 달렸다. 20km를 도착하였을 때 시간이 1시간 50분, 30km 도착 시간이 2시간 55분 이었을 때 나는 이렇게 달리면 지난해보다 30분 정도를 단축하는 3시간 대 기대에 들떠 버렸다.
우리들은 마치 기러기 마냥 페이스메이커를 앞세우고 V 대형을 이루어 달렸다. 기러기가 V자로 나는 이유는 함께 날며 격려하고 협력을 한다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 달리는 것 보다 함께 그룹을 지어 달렸고 힘들어하는 달리미들을 위해 서로 힘내라고 외치고 박수를 쳤다.
그렇다. 마라톤은 고독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때로는 옆에 함께 달리는, 옆에서 격려하는 이웃들과 함께 달리고 있는 것이다. 혼자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이 어깨 걸고 한 걸음 달리는 것이다.
이러한 들뜬 기분도 잠시, 30km를 지나면서 긴급하게 싸이렌을 울리며 뒤 쫒아 오는 구급차는 내 발걸음을 무디게 하였고 앞으로 내달리던 다리는 이내 물 먹은 솜이 되었다. 지난해보다 연습량이 적었던 몸은 내달리기를 용인하지 않았다. '내 치즈를 누구 옮겼을까'저자 스펜서 존슨은'선물'에서 '과거에서 배우라'라고 하였는데 지난 해 무리한 오버 페이스로 마지막 지점에서 힘들어하였던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포천 3.8선 마라톤'등판을 매달은 선수가 얼핏 보였다. 20여년 만에 본 후배 녀석은 한눈에 나를 알아보았다. 안부를 서로 물으며 30km를 달려 왔으나 한 번 힘이 빠진 다리는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제 속도로 가라고 하였는데 나는 잊어 버렸던 것이다.
발바닥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물집이 생겼는지 걸을 수조차 없다. 왼쪽 허벅지도 잘못된 것 같다. 종아리 근육이 뭉치기 시작했다. 마라톤은 역시 정직한 운동이었다. 씨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다. 걷는 달리미들은 지친 나를 유혹하였다. ꡒ걸어도 돼! 누가 걷는다고 질책하는 사람이 있냐!ꡓ 그렇다. 나는 운동이 부족한 만큼 이상이나 정신도 나약해 졌던 것이다.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군이 쓰러졌던 언덕에서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 하였고 ꡒ이 고비만 넘기면 됩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으로 마라톤을 하는 것입니다.ꡓ 라는 방송소리를 들었으나 마음만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수많은 달리미들이 마치 멈추어 제자리 뛰기 하고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났고 걷지 말자던 나와의 약속을 나는 저버렸다. 뭉쳐있는 근육을 풀고 다시 일어섰다. 군악대가 힘내라고 뿜바거리고 자원 봉사하는 딸 같은 녀석들이 ꡒ아저씨 힘내세요ꡓ라며 음료수를 건네주어도 다리는 그동안 절제하지 못했던 나의 정신을 마치 괘씸하여 혼내려는 듯 일으켜 주지 않았다.
다시 힘을 내려고 일어섯 지만 뭉쳐진 근육의 통증은 한 없이 나약한 존재만을 보일 뿐이었다. 주변에도 나와 같이 얼굴이 일그러진 달리미들이 고통스러했다. 내 앞을 지나치는 시청동호회원들이 힘내라며 어깨를 만져주고 지나갔다.
따끔거리는 수지침에도 양손에서는 피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많이 뭉쳤네요" 피는 금새 휴지를 붉게 물들였다. 아예 도로에 주저앉아 종아리 근육을 문지르고 근육 파스를 뿌렸으나 다리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시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은 애처럽게 쳐다보았다.
지난 해 겨울, 공직에서 해임되어 거리로 내몰렸던 나의 존재가 떠올랐다.
하루 출근하지 않고 한나절 지참하였다 하여 해임되었던 우리들은 부당한 현실과 걱정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괴로움으로 몸을 떨었고 때로는 같이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격려와 위로를 하는 동료들의 따뜻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었다. 어떤 후배 녀석은 "제가 형님들을 죽였습니다."흐느꼈고 어떤 녀석들은 밤늦게 술에 취해 "선배님, 괴롭습니다. 같이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흐느적거리기도 하였다. 공직배제의 부당함을 알리는 1인 시위가 100일 지속되는 동안, 노조 홈페이지에 격려글이 쇄도하고 출근 차량에서 경적을 울리며 힘내라고 손을 흔들고 따끈한 음료수를 손에 쥐어 주던 선후배들의 가슴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었다.
차가운 거리로 내몰렸던 날, "정든 직장으로 돌아가자"라는 몸자보를 하고 빌딩숲으로 사라지는 석양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우리는 내가 왜 이곳에 서 있는가, 꿈인가, 하는 물음을 서로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허허로운 웃음으로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였었다. 뜨거운 동료들의 사랑에 고마워하고 때로는 비애를 느끼며 한잔 술에 흐느적거리며 결코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던 또 다른 그는 소청심사를 끝내던 날 결국 그렇게 눈물을 내 앞에서 보였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생맥주 집을 나왔을 때 추적추적 새벽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깨동무도 하고 껴안으며 오히려 비가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있음을 고마워했었다. 그리고 복직된 지 어느새 5개월이 흘렀다.
나는 마라톤을 하고 있다.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쓰러지지 말아야 한다. 내가 힘들면 저들도 힘들 것이다. 이제 2km 남짓 남았다. 다시 일어나서 달리자. 옆에 백인이 달리고 있었다. 출발 전에 몸을 풀고 있던 흑인 선수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작가 박범신은 행복하세요!, 안녕하세요! 뜻을 지닌 네팔의 말 ‘나마스테’ 라는 책을 통해 비정한 한국인들과 피부색으로 구분 하여 인권을 도외시하고 유린하는 사회를 고발하였다. 그러면서도 주인공 카밀을 통해 ꡒ세상이 화-안해요ꡓ라며 사랑을 노래하였다. 이 대회 3연패에 도전하는 케냐 무타이 선수도 단지 얼굴색이 검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무시를 당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운동장 입구에서는 가족들과 직장 동료, 친구들이 도열하여 완주를 한 달리미를 얼싸 안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에게는 기록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코끝이 시큼해왔다.
비록 지난 해 보다 10분 뒤졌지만 나는 완주를 하였다. 운동장 한바퀴를 달리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유혹과 반성,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과 용기를 생각하게 한다. 다리야! 무리를 하여 고통을 안겨주어서 미안하다. 애 썻다.
2005. 10. 23
최영석 기자 news@woorian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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