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 말은 요즘 정치인들에게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선거 전에 약속했던 수많은 공약들이 막상 선거에서 당선된 뒤에는 그의 자세부터가 달라지면서 한 번도 제대로 지켜진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런데 나는 근자에 ‘초심’이라는 말이 “처음(밑바닥)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전에 방영이 끝난 인기 드라마‘쩐(錢)의 전쟁’에서, 사채 때문에 아버지를 비명에 잃은 금나라는 그 한을 풀기 위해 사채시장에 발을 들여 놓고 사채업자가 된다. 갖은 곡절 끝에 수십억을 주므르다가 빈털터리가 돼버린 그는 사채시장의 큰 손 이지만 서민들을 위한 철학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채업계의 대부 앞에 무릎을 꿇고 절규한다.
“선생님! 저, 돈 좀 벌게 해 주십시오. 저는 돈을 많이 벌고 싶습니다.” 그러자 그 대부는 “초심으로 돌아가라.”면서 “돈을 벌고 싶으면 내일부터 시장을 돌며 일수(日收) 찍는 일부터 하라.”고 일을 맡겼다. 수십억을 주무르던 금나라는 군소리 없이 시장 가방을 옆으로 메고 시장통 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수십 년 전의 후회스러웠던 아픔이 전율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때 왜 저런 용기가 없었을까?” 그러나 이제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미 수십 년 의 세월이 흘러 가버린 것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연로하신 아버님을 대신해 가정을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공업계 실업학교를 지원했고, 취업준비 때문에 대학 입시공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평소에 존경하던 N박사님을 1주일에 두 번씩 방과 후에 자택으로 찾아뵙고 철학에 대한 사사(師事)를 받고 있었다. N박사는 당시 75세의 고령으로 미국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서 명문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 한 분이였는데, 나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아껴주시던 분이였다.
우리 집 가정형편을 잘 아시는 N박사님은 “그래도 대학에는 진학해야 한다.”고, 거의 강권하다시피 나를 설득하셨고 그에 따라 K대학교 경제과 야간학부에 입학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렀으나, 합격이 돼도 등록금을 마련할 힘이 없는 나는 때마침 지방에 일이 생겨 합격자 발표도 보지 못한 채 한 달 동안을 지방에 가있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N박사님은 자비로 등록금을 완납하시고 그 영수증을 주시면서 “이 등록금은 이다음 성공해서 갚으라.” 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셨다. 얼마 후 취직까지 되어서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는 학교에 나가는 주경야독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N박사님께서 직장으로 전화를 주셨다. 직장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물으신 후, “웬만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구두 닦는 통을 하나 짜 줄 테니 구두닦이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으셨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고등학교 졸업자도 고학력자로 취급했는데 이제는 야간대학이나마 대학생인데 ‘슈샤인보이’를 하라니? 말이 안 되는 말씀 이였다.
내가 대답을 안 하자 N박사님은 “네가 체면 때문에 못하겠다면 이 늙은 내가 옆에 같이 있어줘도 안 되겠느냐?” 고 재차 물어오셨다. 순간 나는 야속한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리 등록금을 내 주셨어도 너무 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단호하게 “저는 못 하겠습니다.” 하고 잘라서 거절해버렸다.
이제 와서 그분의 깊은 뜻을 깨닫고 후회하면서 머리 숙여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는 말씀을 수없이 드리고 싶다. 그때 박사님은 나에게 “초심으로 돌아가서 땅속 깊이 뿌리를 박고, 민초(民草) 들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으로 깨달아서 큰 인물이 되라.” 고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요즘 ‘이태백’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뜻) 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대졸자들의 실업률이 100만 명을 넘는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들 고 학력자가 취업할 마땅한 직장이 없기 때문 일 것이다. 반면에 중소기업에서는 일할사람이 없어 극심한 애로를 겪고 있지만 이들 고학력자 중에는 공장에 가서 일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수십만 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는데 문제점이 하나, 둘이 아니다.
우선 그들의 인건비만큼의 경제적인 부(富)가 외국으로 새어 나가는가 하면 치안 문제도 말이 아니다. 토막 살인에, 그들 나라에서 조폭까지 들어온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제, 고학력자를 양산(量産)하는 교육정책을 초심(初心) 을 가르치는 것으로 바꿔야 하지 않겠나?’
이재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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