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떡갈나무 단풍이 고왔을 텐데도 그림자의 색깔은 왜 그리 검고 칙칙한 빛깔이었을까. 그 곳의 산들은 가을이 되면 그 그림자를 더욱 크게 드리우면서 마을을 위협했다.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열심히 콩을 뽑기도 하고 고구마를 캐기도 했으나 기쁘지는 않았다. 수확의 보람이니 추수의 기쁨이니 와는 관계없이, 학교라고 다녀와서 해가 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고 일들은 모두 힘에 겨웠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그림자는 더욱 흉물스러워졌다. 거기다 스산한 바람까지 불어 오면 나는 야전군처럼 몸을 움츠리고 긴장을 했다. 밭에서 추수하는 일을 거드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그것들을 집으로 옮기는 일이다. 문전옥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먼 밭의 농사를 지어본 사람아 아니면 제대로 알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한결같이 밭들은 그렇게 먼 곳에 있었는지.
콩을 심은 밭은 웃 마을을 지나 부잣집 장군논길을 지나 산길을 한참 걸어 가서야 나오는 골짜기에 있었고 고구마 밭은 마을길을 빠져 나가 방죽 둑길을 지나 개울을 건너가서야 있었다. 넘어가는 해가 노을도 뿌리고 노을에 젖은 단풍이 웃음도 날렸을 테지만 몸에 맞지 않는 지게에 무겁게 뭔가를 지고 가는 나에게 가을 그림자는 저승사자 옷깃 같은 것이었다.
그 그림자를 밟고 분주히 오가던 논길과 밭길들로 가득 찬 그림자가 어둠이 되어도 가을 일은 끝나지 않았다. 날이 밝기도 전부터 돌아가던 탈곡기 소리가 멈춘 후에도 타작마당의 할 일은 남아 있었고 그런 밤의 나에게 추수는 고단 것일 뿐이었다.
아마 어른들도 그랬을 것이다. 저축을 한다든지 살림을 늘린다던지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입에 풀칠하자고 고통스럽게 일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따분하고 힘들었을까.
그래도 이나마 추수로 오는 겨울 자식들하고 굶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추수기의 그들은 그 고단함을 이겼을 것이다.
그곳의 가을은 퍽 짧았다. 억새꽃 휘날리면 이내 겨울이 오고 골짜기는 한 없는 적막에 휩싸였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가을 끝자락의 바람은 푸서리에서 만난 뱀보다 싫은 것이었다. 내 머리며 옷자락을 한없이 휘저으며 볏단을 나르던 나를 쓰러트릴 듯 불어대던 그 바람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어쩌면 그 검은 그림자들이 바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서리가 내리기 전 서리거둠을 해야 하고 눈이 오기 전 알곡을 집으로 들여야 하는 그곳의 가을은 종종걸음으로 그 마을을 떠났고 마침내 겨울이 와서 눈이 쌓이면 알량한 양식을 아껴 먹으며 우리는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곳의 가을은 그래도 아름다웠다. 어찌 오색찬란(五色燦爛)만 아름다움이겠는가. 어찌 유유자적(悠悠自適)만 행복함이겠는가. 그곳의 그 암울함과 경황없음들이 새삼 아름답게 바라보여 지는 것은 오늘 우리가 만들어 낸 최고의 것들 속에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아도 두부 부침과 제육 볶음. 그리고 새로운 저녁 식탁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런데 두부의 콩은 호주산이고 제육볶음의 쭈꾸미는 베트남, 새우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것이다. 이동거리가 최하 2만여 킬로미터,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대한민국 한 가정의 식탁에 올라 오기 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멀리서 올수록 그리고 유통과 가공을 여러번 거칠수록 안전성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바다를 건너온 과일과 곡물이 어떻게 방부처리됐는지, 어떤 사료를 먹고 자란 소가 수입됐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에 대응하여 등장한 푸드 마일리지 (food mileage) 니 로칼 푸드(local food)니 하는 말이 주목을 받고 있는 요즘이다.
그곳의 가을그림자 속에는 그래도 생명이 있었다. 진실도 있었다. 그것은 오염되지 않은 것이었고 유해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그림자 속에 고단한 몸을 눕히고 잠간 눈을 붙인 농부들이 꼭두새벽에 다시 일어나 탈곡기 돌리는 소리로 골짜기를 깨울 때 그들이 먹던 것과 마시던 것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찾아 온 그곳의 가을 준것들이었다.
그곳의 가을은 그렇게 말없이 좋은 것을 가지고 찾아와서 고단한 그들을 품고 있었다. 그림자는 바로 그 품이었을 것이다.
최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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