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년, 종착역에서


▲ 류근원 비봉초교 교장/아동문학작가

모든 것이 가라앉고 있다. 산과 들 그리고 가로수가 겨울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기축년 한 해도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다.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과 현란하게 돌아가는 네온사인, 그리고 보통 때보다는 더 빠르게 느껴지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12월이 다른 어느 달보다 빠름을 실감케 하고 있다.

다사다난했던 기축년의 종착역이 저만큼 보이는 지금, 우리에게 지나온 역의 회상에 침잠할 수 있게 해주는 12월이야 말로 소중한 달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이란 고된 삶을 싣고 쉼 없이 달려온 기축년, 인연을 같이 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기축년 종착역에서 돌아보아야 한다. 고마워하고 사과하며 미안해하는 생각의 우물파기에 침잠해야 한다.

제일 먼저 나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인연을 같이 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눈빛을 보낸 눈에게 고마워하고, 정겨운 말 한마디를 보낸 입술에게 고마워하며, 아름다운 음악을 들어준 귀와 꽃향기를 맡게 해준 코에게도 고마워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내 손과 부지런히 길을 걷고 때로는 힘든 길을 걸어왔던 다리에게도 고맙다고 해야 한다.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좋은 일엔 같이 기뻐해주게 만들었던 머리와 심장에게도 고마워해야 한다.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 타인처럼 대했던 내 몸에 진정한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족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의 빈자리를 더 크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는지? 부모님이 고맙고 아내와 남편이 더없이 고맙고, 내 가족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반추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나와 인연을 같이 하는 이웃들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한다. 수많은 대인관계에서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 한 마디가 상대방을 서운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내 위주로만 생각하고, 내 위주의 숙성되지 않은 말이 상대방의 가슴에 아픔의 화살로 꽂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말은 우리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징검돌 역할을 한다. 정겨운 인사 한마디가 하루를 아름답게 열어주고, 어깨 감싸며 던진 말 한마디가 가슴 속의 아픔마저 씻어주는 샘물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새소리보다, 바람소리보다, 악기가 내는 화음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사람의 목소리임을 알아야 한다. 나의 말로 인해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만나서 사과를 해야 한다. 자신이 없다면 전화도 좋고 문자메시지나 연하장으로 대신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다음 눈을 감고 지난 1년을 차분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가?" 에 대한 수많은 물음표 속에 빠져 들어야 한다. 그래서 12월은 돌아온 날들을 반성하면서 삶의 목표를 재정립하는 달이기도 하다. 목표는 미래의 것이지만 동시에 오늘의 것이기도 하다. 내일 성취해야 할 목표를 정하지 않았다면 오늘 무엇을 하게 될지 망연자실 앉아 있어야 한다. 목표가 없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낭비적이고 퇴폐적인 오락에 열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계를 멈추어 두면 녹슬어 쓸모없게 되듯, 우리도 움직이지 않으면 몸과 마음에 녹이 슬게 마련이다. 목표가 주는 자극이 있어야 삶의 희망이 있고 인간다워진다. 많은 돈이 목표라면 부지런히 일해야 하고, 건강이 목표라면 열심히 운동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려면 거울 앞에서 정성스레 단장해야 한다. 목표의 크고 작음, 높고 낮음 그런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목표가 없는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뿐이다. 지금 나이가 몇이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어떤 환경이든 개의치 말고 정해진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12월이 우리들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잦은 송년회와 동창회 등 많은 모임은 우리의 심신을 오히려 지치게 만들어 자칫하면 12월이 주는 의미를 상실하기 십상이다. 마음을 정돈하고 마무리하며 다시 겸허한 자세로 나를 돌아보는 12월, 더 큰 성숙을 준비하는 소중한 12월이 우리 곁을 떠나가려 하고 있다.

이제 얼마 후면 새로운 경인년이 시작된다. 2010년도 새 달력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다가오는 경인년을 나의 해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먼 훗날 삶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기축년 종착역에서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 때 세웠던 내 인생의 목표가 있었기에 정말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고….

류근원 비봉초교교장/아동문학작가 kwroo@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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