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근원 동화작가 (화성비봉초등학교 교장)

연이틀 동안 내린 비로 산과 들이 겨우내 가슴 깊이 품고 있었던 연둣빛 물감을 화르르 풀어 놓고 있다. 나무들은 팡팡팡 꽃망울 터뜨리기에 분주하고, 키 작은 풀꽃들은 우리들과 눈맞춤하기 위해 고개를 쏙쏙 빼 올리고 있다.

이 비가 그치면 성큼 다가올 화사한 봄. 생각만 해도 가슴 마냥 설레는 계절, 봄이다.

양지 바른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진달래, 눈이 부시도록 노란 별꽃을 피워대는 개나리, 그리고 만개한 벚꽃이 조그만 바람짓에도 아름다운 꽃비로 떨어지는 가슴 저미는 풍경, 봄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경들.

안산의 벚꽃 가로수길이 너무 아름답다. 벚꽃 가로수 아래를 걷는 연인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명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보인다.

보통 때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 계절이 봄이다. 겨울을 이기고 나온 나무들과 풀꽃이기에 더 마음이 끌린다. 꽃향기에 취해 한대앞역 주변의 화원을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 정도이다.

‘올해는 식목일 즈음해서 나무 한 그루 꼭 심어야지.’ 하면서 화원을 오가곤 했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어차피 그런 것이 인간사 아닌가 자기변명을 하다가 며칠 전에서야 그것도 공짜로 주운 묘목으로 때 늦은 식목을 하게 되었다.

며칠 전, 뜰 한 귀퉁이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나마 그것도 남의 집 대문 앞에 버려진 모과나무 묘목이었다. 커다란 정원에 다 심고 난 볼품없는 찌꺼기인 듯 했다.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주워갖고 온 것이었다. 다 심고 나서도 측은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흙이 묻은 잔가지는 걸레로 닦아 주고, 상처가 나 갈라진 가지는 테이프로 묶어 다독거려 주었다. 제대로 살 수 있을런지 심겨진 묘목은 자꾸만 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키고 어물전….’

옛말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모과나무 묘목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과 한 개에서 우러나오는 향과 소화기능을 좋게 하고 감기나 기관지염·폐렴 등 주요한 약재로 쓰이는 과일인데….

그런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나무를 심은 것만으로는 개운치가 않아 자꾸만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리 바빠 식목일을 그냥 보냈는지 식목일에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40여 년 전, 민둥산에서 묘목 심기에 한나절을 보내야만 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은 더더욱 그런 미안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때 늦은 모과나무 묘목을 심으며 식목일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눈에 보이는 나무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가슴에 나무를 심는다면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할까?

차가운 가슴을 훈훈하게 지펴주고, 메마른 가슴에 은은한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는 나무, 미움과 불신과 시기를 잠재울 수 있는 나무, 그것은 누가 뭐래도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나무가 우리들 가슴에 자라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메말라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문 사회면을 들출 때마다 가슴 섬뜩하게 만드는 사건의 행진. 살인, 사기, 절도, 밀수, 강도 등 사건 기사를 대할 때마다 우리들의 가슴은 겨울처럼 움츠러든다.

겨울바람만이 우리들을 움츠리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우리들을 움츠리게 만드는 것은 나만을 생각하는 꽉 닫힌 차가운 마음이다. 사랑이라는 나무가 우리들 가슴에 자랄 때, 우리는 안으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가 있다. 그 문이 열릴 때서야 비로소 나보다는 이웃을 생각하게 되고, 내 혼자만의 기쁨보다는 여럿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진주조개는 진주가 병이면서 가장 소중한 업적이듯이 우리들에게 가장 숭고한 것은 사랑이다.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 나는 나무는 가슴을 훈훈하게 적셔주는 사랑이라는 나무이다.

이 아름다운 봄이 가기 전, 교외로 나가 봄이 한창인 길을 걸어야겠다.

민들레꽃 노오란 자드락길도 좋고, 이름 모를 키 작은 풀꽃들과 눈맞춤하는 산길도 좋고, 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자꾸만 좋아 보이는 오솔길도 좋고…. 그래서 봄의 느낌표와 말줄임표를 가슴에 켜켜이 담아와야겠다.

나무들과 풀꽃들과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 그리고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따스한 마음. 바로 그것이 봄이 우리들에게 주는 고귀한 선물이며 사랑일 것이다.

이 아름다운 봄날, 눈에 보이는 나무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슴마다 사랑이라는 소중한 나무 한 그루씩 심자. 모과나무 성치 않은 묘목을 심으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류근원 동화작가(화성비봉초등학교 교장)  kwroo@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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