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나는 요즘 고향에 와 있다. 충분히 머무를 생각으로 넉넉하게 일정을 잡고 왔는데 조금 후회하고 있다. 밤에 잠을 못 이루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각기 다른 방에서 주무신다. 서로 수면을 방해하는 버릇이 있어서이다. 아버지는 코골이가 심하고 엄마는 잠을 자다가 혼잣말을 한다. 사실 밤에 중얼거리는 엄마의 이 증상은 오래되었다. 엄마에게는 이것 외에도 치매를 의심할만한 몇 가지 증상이 더 있었다. 그래서 작년에 대학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치매가 아니라는 판정이 나왔다. 그때 의사가 치매 예방 차원에서 처방한 약을 엄마는 꾸준히 복용 중이었다. 증상이 완화될 거라고 했는데 내 눈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이틀째 나는 새벽에 잠이 깨어 푸념하였다. “왜 자꾸 혼잣말해? 엄마가 자꾸 중얼거려서 잠을 잘 수 없어.” 딱 두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잠자코 있던 엄마의 입에서 봇물이 터지듯 얘기가 흘러나왔다. 밤에 그것도 딸과 잠자리에 누워 하는 엄마의 말은 99%가 아버지가 저지른 과거 이야기였다. 바람피운 이야기, 엄마의 돈을 훔친 이야기, 혼자 돈을 물 쓰듯 한 이야기 등등.
이미 수없이 반복 재생된 터라 엄마가 어떤 이야기 하나를 시작하면 내가 일의 중간과 결말까지 다 대신 말해 줄 수도 있었다. 나는 잠을 더 자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봇물을 틀어막았다.
“엄마,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건 엄마의 문제잖아? 왜 자꾸 나를 엄마 문제에 끌어들여?”
그때 내 머릿속에는 칼릴 지브란의 말이 있었다.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으니.’
엄마의 수렁에 빠져 함께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나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어야했다. 그러나 엄마를 등지며 몸을 돌리는 순간 난 바로 후회하고 있었다. 그럼 엄마는 그 한 맺힌 이야기를 누구한테 이야기하나….
어제 세 번째 잠을 잤다. 그것도 아주 잘 잤다. 나는 잠에 빠진 와중에도 엄마가 혼잣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래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엄마는 놀랍게도 여전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의식하느라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로 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했다. 그리고 다시 잠에 빠져 버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엄마의 말 한마디가 의식 저 아래에서 벼락같이 솟구쳤다. 그제 새벽, 잠결에 삼켜졌던 한마디였다. 내가 왜 자꾸 혼잣말하느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불안해서 그래, 라고 흘리듯 말을 한 거 같았다. 엄마는 무심코 그 말을 꺼낸 뒤 바로 그 말을 지우겠다는 듯 아버지 얘기를 쏟아부었다.
그거였구나,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발견이었다. 비로소 엄마의 그 혼잣말의 실체를 본 거 같았다. 엄마는 딸에게 아버지의 과거 악행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그저 딸과 나눌 화제가 필요했고 그래서 익숙한 이야기를 반사적으로 소환하는지도 몰랐다.
혼자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 그 누구도 엄마를 도울 수 없고 엄마 혼자 맞서야 하는 그 근원적 공포 때문에 엄마는 밤마다 혼잣말하였던 것이다.
엄마와 네 번째 잠을 자는 오늘, 나는 엄마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딸 모드로 들어가리라 다짐한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는 어떤 세상이 있는지, 그 세상이 엄마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지 없는지 뭐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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