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지난 일을 잘 기억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다. ‘부럽다’라는 표현으로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난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을 복제했다가 재생하는 일에 약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기 시작했을 때 난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용돈을 준 걸 까먹고 두 번 준 적이 있었다. 일주일 단위로 용돈을 주는데 날을 정해 놓지 않아 화요일에 돈을 받아 간 아이가 금요일에 또 받아 간 것이다.

이 경우는 용돈을 준 행위를 잊은 것이지만 때로는 그 행위의 대상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위해 눈물겨운 희생을 하였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까맣게 모른다면 이보다 더 억울할 수 있을까? 행위의 주체가 기억하지 못해도 그 희생을 받은 대상이라도 그것을 기억해 주면 무척 훈훈하련만 그렇지 않을 때도 흔하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 아마 저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빵을 배급받았다. 늘 그렇듯 이 배급 빵에 대한 내 기억은 토막이 나서 이어지지 않는다. 빵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어떤 냄새가 났는지 아이들이 빵을 어떻게 먹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뚜렷한 것은 두 가지다. 내가 빵을 먹지 않고 집으로 가지고 와 동생들에게 주었다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 빵을 받은 그 순간부터 집으로 와 누군가에게 그것을 넘기기 전까지 나를 사로잡았던 강렬한 유혹.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나는 실은 이 유혹에 관해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변변한 간식이 없던 시절, 여덟 혹은 아홉 살 꼬마가 제 손에 빵을 쥐고 있었다. 먹고 싶은 마음과 참아야 하는 마음이 계속 싸웠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먹고 싶은 마음이 이긴 적이 없었다. 무엇이 이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을 뿌리치게 했을까? 동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 아마 사랑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 일생을 통틀어 이때가 동생들을 가장 사랑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지금 내 눈물겨운 빵을 받아먹은 걸 기억하는 동생 놈이 없다. 네 명 가운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칠 남매가 모두 있을 때 두어 번, 이 빵 얘기를 꺼냈었다. 그런데 수십 년 전의 내 애틋한 ‘사랑’은 충분히 호응받지 못했다. 동생들은 예사로이 기억을 점검하다가 다른 왁자지껄한 얘기를 꺼내 곧 내 얘기를 묻어 버렸다.

나이 드신 분들이 한 얘기를 하고 또 하는 수가 있다. 말해 놓고는 그 사실을 잊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공감해 주지 않는 탓이 크다. 충분히 위로받지 못해서 자기도 모르게 계속 그 이야길 꺼내게 되는 것이다. 나도 나이 먹었다. 가끔 손에 빵을 들고 먹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집으로 향하던 꼬마를 생각한다. 아무도 그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억울하다.

그 배급 빵을 다 먹었더라면 내 키가 한 이 센티미터쯤 더 컸을지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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