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만 해도 가정에 샤워나 목욕시설을 갖추어 놓은 집이 거의 없었고 생활형편이 어려워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몇 달에 한 번 동네 목욕탕에 가서 묶은 때를 벗겨 내던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섣달 그믐이면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한 머리로 새해를 맞기 위해서 이 곳들은 붐비고 바빴던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목욕탕에 갔었을 때 그 붐비는 탕 안에서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예절이 깍뜻했었다. 탈의실에 옷을 벗어 놓고 탕으로 들어 갈때에는 수건으로 아래를 가렸고 샤워 설비가 없었던 때라 욕조 안의 물을 조심 조심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안가도록 바가지로 떠 내어서 깨끗하게 몸을 씻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행여 큰 소리로 떠든다던지 탕 안을 뛰어다녔다가는 아버지나 어른들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받았기 때문에 목욕탕에 갈 때에는 항상 조심스러웠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여탕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한국 여인들의 다소곳한 성격이나 예절 바른 행동으로 보아 상당한 품위와 질서가 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러나 남탕의 풍경은 좀 다르다. 마치 자기의 육체미라도 과시 하려는 듯 보무도 당당하게 탕 안을 헤집고 다니기 때문에 왜소한 사람은 기가 죽을 판이다. 게다가 샤워기를 틀어 대강 물만 한 번 끼얹고는 그대로 탕 안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비누칠을 끝낸 수건들이 탕 바닥에 내던져진 채로 뒹굴고 있어 욕탕 근무자가 틈틈이 들어와서 정리를 하는가 하면 사용하고 난 면도날을 비누곽 속에 내던져 두어서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게 되면 발바닥을 다칠 수도 있다.
그날따라 탕 안에는 섣달그믐 날이 가까웠는데도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2~3학년쯤 돼 보이는 어린이들이 평소보다 조금 많은 것 같았다.
그들은 섣달그믐을 앞두고 친구들끼리 무리를 지어 온 듯 왁자지껄 떠들면서 냉탕에서 온탕으로 또 온탕에서 냉탕으로 텀벙거리며 왔다 갔다 하더니 일부는 바가지에 물을 퍼 들고 쫓아가고 또 일부는 이를 피해서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는데 욕탕 안을 빙빙 돌면서 온통 난리가 났다.
그러나 탕 안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이들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혹시 이 애들이 넘어져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서 『얘들아! 이제 그만해라. 다칠라』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낄낄대며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저희들끼리 바가지의 물을 끼얹는다는 것이 그만 목욕 중이던 어느 손님 얼굴에다 정통으로 끼얹어 버리고 말았다. 별안간 얼굴에 물벼락을 맞은 그 손님은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야 이놈들아! 다 이리와』하고 불러세우고서는 『여기가 너희들 놀이터야? 나쁜 놈들 같으니』하고는 한 놈씩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그 때 건장한 사나이가 욕조에서 튀어나오면서 소리쳤다. 『여봐요! 당신 왜 남의 아이를 때리는거요?』 그러자 그 손님도 지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이 애들이 잘했다는거요?』 『이 애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머리를 때려! 애들이 그럴수도 있지』 『당신이 아마 애들 부모 같은데 그럼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고 애들을 야단쳐야지. 안그래?』 『그런데 당신 왜 반말이야!』…… 급기야는 감정싸움으로 번져 벌거벚은 두 사나이가 대결하는 일촉즉발의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탕 안에 있던 사람 중에 이들을 말리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려고 나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날 목욕탕 안에서 벌어졌던 해프닝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소매치기를 보고서도 못 본체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세상」 「범죄자와 경찰관이 대로상에서 격투를 벌여도 빙 둘러서서 구경만할뿐 경찰관과 합세해서 범인을 잡으려 하지 않는 세상」…… 나에게 해가 없으면 입 다물고 구태여 앞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는 세상이다. 어떻게 이런 세상이 되었나?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 다음 이 아이들이 장성해서 이 사회의 주역들이 되었을 때 그들은 과연 부모님을 존경하고 어른들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을까? … 우리들은 언제까지 비겁한 방관자로 남아있을 것인가?
<이재중 논설위원 webmaster@an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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