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월 9일은 설이다. 요즘 대부분의 직장들이 주 5일근무제라 징검다리 연휴로 치자면 2월 4일(금) 오후부터 2월 13일(일)까지 장장 10일가량을 쉬게 됨으로 수출전선에 차질이 우려되어 비상대책이 강구된다고 하니 이게 바로 일대 법석이 아니고 무엇이랴. 설하면 먼저 떠 오르는 게 민족의 4분의 3이 움직이는 대이동에 따르는 귀성전쟁이라 할 것이다. 육·해·공 다 비좁아 아우성일 것이 뻔하다.
절정에 이르면 평소 육로로 4시간 남짓이던 귀성거리를 12시간 이상 걸리는데 그래도 OK이니 이게 또한 묘하다. 왜 그럴까? 국어사전에 보면 「귀성이란 고향에 돌아가 어버이를 뵘」이라 되어 있다. 이런 까닭이니 어찌 OK가 아니랴.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했으니 그런 대가쯤은 오히려 기쁨이어야 마땅하다 하겠다. 아무리 목 놓아 가고파도 60년 넘게 고향에 갈 수 없는 북녘 실향민들의 피울음을 헤아린다면 그 정도의 괴로움쯤은 약과가 아니겠는가?
그럼 고향이란 무엇이기에 그처럼 법석인가? 정지용(1903~?)의 시 「향수」를 음미하노라면 그 속에 다 담겨져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엔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은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실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덧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진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뿔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짓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흔들리는 잡초에도 뿌리가 있다. 했거늘 60년 넘게 귀향길이 막힌 실향민들에게 어찌 목메이는 고향 노래가 없을손가. 1989년에 KBS라디오 방송을 통해 멀리 사할린에까지 울려 퍼졌던 내가 지은 노래 「북청땅을 아시나요」를 다시 소리내어 불러본다. 목이 메인다.
함경남도 내고향 북청땅을 아시나요
신포·신창 포구에는 만선 뱃고동
기름진 산과 들에 넘치던 인정따라
구성진 가락맞춰 사자놀이 춤사위
어머님 가슴처럼 그리운 고향
꿈속에서 손 흔들다 잠이 깬다오
이준열사 나신 곳 북청땅을 아시나요
민족의 등불이신 열사의 고향
목마른이 오시오 기다리던 내가 왔소
산길 뱃길 넘나들던 북청 물장수
지금도 들리는 듯 아련한 고향
북행열차 타고 가다 잠기 깬다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학생시절의 귀향길 낭만이 눈에 선하다. 진절이가 나도록 이어지던 그 수많은 터널 - 차창 사이로 스며든 석탄차의 검정이가 젊은 여인들에게까지 콧수염을 그려 그걸 마주보면서 웃음을 참느라고 혀를 깨물다가 피가 나기도 했었지. 그러면서도 더러는 푸른 파도가 레일 바로 밑쪽은 자장가처럼 찰랑거리던 그 여로가 가물거려 견딜 수가 없다. 그냥 맨발로 달려가고픈 고향의 바닷가. 태양열에 뜨겁던 그 은모래 밭이 눈에 삼삼하기만 하다. 그리워라 하냥 그리운 고향이여!
몰라보게 잡초 우거졌을 조상의 무덤을 생각하면서 이제 내가 묻힐 곳을 생각해야 하니 이 피울음 어찌 참는담 「북행열차 기적 울리며 힘차게 떠날 그날 나는 그 속 맨 앞자리에 타고 있을테야」이게 고작 위안이니 더욱 서글프다. 남들은 1년 내내 소원했어도 설날 세배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풀리거늘 우리에겐 그 舊正과 舊情이 하나 되는 길이 막힌 채 인생의 황혼길에 섰으니 이젠 울부짖을 기력마저 쇠잔해 간다. 통일에의 기대는 돋보기 너머에 마냥 뿌옇다. 이 아침 북녘 고향이 그리워 최직태의 옛시조 읊조리며 홀로 시름을 달랜다. 동반자 없어 외롭구나.
한잔 쓰고 눈물지고 두자 쓰고 한숨지니
字字行行이 水墨山水가 되었구나
저 남아 울고 쓴 편지이니 눌러볼까 하노라.
복이 넘쳐 남쪽에 고향을 가진 이들에게 그대는 얼마만큼 고향을 사랑하느냐고 묻고 싶다.
한 젊은이가 야밤에 성당에 신부님을 찾아와서 자기의 소원이 이뤄지게 기구해 달라고 청하면서 마지막 소원은 대통령이 되는 거라고 했다. 신부님이 『그 다음 소원은?』하고 묻자 그는 막혔다. 그는 그 다음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그 다음은 永生일 테지?』『아 맞습니다』『젊은이 그 소원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 생각나선 아니되네. 지금부터 그 소원을 위해 착하게 열심히 남들에게 베풀며 살아가야 하는 걸세』
고향을 진정 사랑한다면 성공한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이번 귀성에서 보고 듣고 다짐해야 할 일을 찾아내야지…….
<이기지논설위원 webmaster@an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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