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얼마 안 있다 아내가 물었다.
『뭘?』
『1월 23일이 무슨 날인지?』
그 날은 우리가 결혼이라는 분복(分福)을 받아 가정을 꾸미고 살게 된지 29년이 되는 결혼기념일이다.
『알지 우리 결혼기념일 이잖아.』
『몇 주년인지도?』
그런데 나는 해마다 그것이 아리송하다. 원래 숫자개념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결혼 기념일이라는 것을 몇 주년이니 해 가면서 기억하고 살지 않는지라 정답을 맞춰 본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글세 도대체 몇 년째지?』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29년째라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마치 그것만 외우고 사는 사람처럼 해마다 정답을 일러준다.
결혼하고 4년 되던 해 그것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둘이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결혼생활 대부분을 교회에서 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이라는 것도 이십 구 년이라는 것도 실감이 잘 나질 않는다. 그만큼 우리는 가정 일보다는 교회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했으며 부부라기보다는 일을 위한 동지로서 이십 구 년을 살아 왔기에 남편으로서나 아내로서의 추억보다 교회 개척이나 성전건축의 벅차고 분주한 기억들이 더 많은 편이다. 또한 교회 일 더 잘해 보려고 부부싸움도 적잖이 했다. 생각해 보니 다른 일로 다툴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교회만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훨씬 더 행복했을 거라는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물론 우리가정은 교회 때문에 행복했다.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무엇으로 보나 우리는 행복한 가정이고 성공한 가정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하여 우리 가족들은 참 많은 부분들의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교회보다 가정을 더 중히 여기신다면 나는 분명히 실책을 범한 가장이 될 것이다. 하기야 더 중하고 덜 중하고가 어디 있겠는가.
이 둘은 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기관으로서 함께 중요한 것이지만 언제나 나는 교회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믿고 가족들의 희생을 강요하곤 했다. 내가 그런 목회를 하는 동안 우리 가족에게는 여러 가지 피해와 아픔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아픔들이 깊어가고 있을 때에도 나는 그 것들을 당연시하며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그 중에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아내였으리라.
『여보 이십 구 년 동안 힘들었지?』
아니라고 하질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힘들었나보다.
『우리 어디 바닷가에라도 다녀올까?』
그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바닷가에라도 가서 함께 밤바다라도 바라보며 고마웠다는 말도 하고 그 동안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을 사랑했다는 말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만 당신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말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달라진 것인가. 그러잖아도 남들이 시인 목사하고 사니까 운치가 있을 거라고 한다며 은근히 그런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것 같았는데 차제에 용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며칠을 지내다 잊어 버렸다. 더구나 그날은 주일이라 계획을 세울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홍성의 한 교회에서 저녁 헌신 예배 강사로 부부가 함께 초청을 받는 바람에 그 소박한 꿈이 이루어 졌다.
하나님이 이렇게 결혼 29주년 여행을 시켜 주신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홍성으로 가는 길에 차창에 스쳐 지나가는 겨울풍경을 보니 전에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저녁 식사대접을 잘 받고 예배도 은혜 중에 마쳤다. 그리고 밤이 깊기 전 우리는 바다를 향했다. 홍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천수만 간월도 일찌감치 오가는 차도 끊기고 가로등만 적적하게 잘 닦여진 길을 비추고 있는 방조제 너머로 먹빛 바다와 갯벌에 별빛이 떨어져 보석처럼 묻히고 있다. 그 많은 철새들은 어디서 날개를 접고 자고 있을까. 섬 사이로 달이 뜬다고 해서 간월도(間月島)라 했다더니 그 날 따라 열 나흘 달이 섬 사이로 떠 바다와 섬을 어우르고 있었다. 실로 환상적인 밤이다. 마치 신혼부부라도 되는 듯 함께 손을 잡고 그 월하의 해변을 걷다가 아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여보!』
달이 아름답다고 하려나 나를 사랑한다고 하려나 그러나 그 때 아내가 한 말
『그 돈 어떻게 할거예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돈이라니?』
『대출금 이자 넣느라 집사님이 카드로 현금서비스 받은 거 내일 막아야 하는데....』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잖아도 요즘 돈 얘기만 나오면 스트레스가 켜로 쌓이는데 여기까지 와서 갚을 돈 이야기라니. 성전건축의 대사를 경영하느라 은행에서 대출 받은 건축비 이자문제로 날마다 씨름을 하는 목사를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주는 아내가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오늘 하루만이라도 딴 이야기 좀 하면 안되나 싶은 게 속이 상했다. 그래서 한 마디 한다는 것이
『아니 내가 재정부장이야? 왜 나한테 어떡할 거냐고 다그치는 거지?』
『당신이 빌려 오랬잖아?』 아내도 한 마디 한다. 질세라 나의 모르쇠도 계속된다.
『그렇다고 내가 갚냐? 교회가 갚는 거지. 난 몰라!』
『아이고 그럴 줄 알았어. 당신 말을 듣고 움직인 내가 병신이지.』
『그게 날 위해서 움직인 거냐 하나님을 위해서 한 거지.』
『말 잘하네 그때 내가 당신하고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였어. 내 인생에 최대의 실수는 당신하고 결혼 한 거야.』
『아니 언젠가는 가장 탁월한 선택 이였다고 하더니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그래서 되겠어?』
『듣기 싫어 아이고 억울해.』
결혼 29주년의 결론은 억울해 흘리는 눈물이 되고 말았다. 비록 우격다짐으로 일관했지만 간월도 달빛 아래서도 교회생각만 하고 있는 아내를 나는 존경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여보 억울해 하지 마. 지난 29년 우리가 고생은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죽었냐? 망했냐? 아니잖아? 빌린 돈 100만원가지고 다섯 평도 안 되는 가겟방에서 교회 개척을 시작한지 25년 송아지 한 마리로 결혼 생활을 시작한지 29년 그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 것이 30배야? 60배야? 아니잖아? 100배 1000배 그것도 아니잖아. 헤아려 봐 우리는 문자그대로 만 배의 축복을 받았어. 그럼 된 거 아닌가? 참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 누군 줄 알아? 그건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예수님이야. 예수님 생각하며 나머지 길도 열심히 가자.』
언제 그랬더냐 싶게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달은 더욱 밝게 그 빛을 간월도 밤바다에 쏟고 별은 더욱 깊이 그 빛을 천수만 갯벌에 묻는 것 같았다.
<최세균 논설위원 webmaster@an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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