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적 근대화는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 정부 주도의 강력한 개발 드라이브를 통해 한국 사회는 단기간에 성공적인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 사회, 문화, 환경 부문 등의 저발전과 파행화를 대가로 이루어 진 것이었다.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될수록 오히려 사회전체의 통합성을 위협하게 된다는 점에 ‘돌진적인 성장지상주의’(rush-to growth)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상이한 사회 부문, 지역, 행위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발전의 심각한 불균등성은 압축적 근대화의 부수효과(side effect)라기 보다는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새로운 근대화 전략을 모색하는 작업은 이런 맥락에서 압축적 근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룩한 한국 사회의 양적 성장을 질적인 성숙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보다 공정하며 효율적인 방안을 찾아내는 일이 된다. 그 핵심은 사회 전체의 통합성과 형평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일이다.
그와 관련 최근 한국 사회과학계에서는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drnization)와 관련된 논의들이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있다. 성찰적 근대화론은 근대 체제를 떠받쳤던 기본적인 원칙과 가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방법으로, 가장 포괄적인 범주와 수준에서 압축적 근대화의 전면적인 해체와 재구성을 시도한다. 압축적 근대화가 중앙 정부에 의해 주도된 외재적이고 수직적이며 획일화된 근대화 프로그램이었다면 성찰적 근대화는 민주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생태친화적인 근대화를 목표로 한다. 그런 맥락에서 다양한 사회 주체들 사이의 민주적인 의사소통, 고유한 지역적 특성에 대한 존중과 그들 사이의 개방적인 네트워킹, 그리고 행위 주체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법과 환경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제도화하는 문제 등이 성찰적 근대화의 주요한 실천 과제로 설정된다.
안산은 몇 가지 점에서 한국 사회의 대안적인, 곧 성찰적인 발전 전략을 모색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준거가 될 수 있는 도시이다. 안산은 우리 나라 최초의 완전한 계획 도시로서, 박정희식 압축적 근대화의 노하우가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안산 건설 초기에 해당하는 1980년에서 1990년에 이르는 10여년간 무려 709%에 이르는 인구 증가, 2,998%에 이르는 제조업 생산액 증가, 12,087%에 이르는 수출 증가, 888%에 이르는 제조업 고용비율 증가를 이루어냈을 정도의 외형적인 초고속 성장이 이를 웅변적으로 대변해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안산은 압축적 근대화의 딜레마 역시 명증하게 노정하게 된다. 지역 공동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된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의 과정에서 안산 지역에 고유한 전통, 삶의 양식과 조건은 와해되었다. 환경 재앙이라 일컬어지는 심각한 환경 파괴(시화호)가 자행되었고, 염료, 화학 등 서울 지역에서 밀려난 중소오염원업체들이 주를 이룬 반월공단에서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조건에 기반한 비인권적인 노동 차별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안산은 나그네들의 도시라 불릴 만큼 원심력이 강한 도시가 되어버렸고, 시민들이 체감하는 삶의 질은 전국 도시중에 최하위권에 머물 정도로, 불편한 도시로 낙인찍혀버렸다.
한국 사회 전체의 대안적인 발전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학자들이 안산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안산이 그러한 왜곡된 근대화의 문제점들을 자정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대한민국 거의 유일한 도시라는 점에 있다. 무엇보다도 노동, 환경, 시민 운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자발적인 시민 사회 역량의 성장이 가장 큰 자원이다. 노동, 환경, 복지 분야 등에서 계획 도시 안산이 ‘압축적으로 건설’되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전형적인 압축적 근대화의 딜레마들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안산의 시민 사회 역량은, 그 어떤 도시도 흉내낼 수 없는 자생적인 리더쉽 및 대안적인 사회 자본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90년대 이후 이주노동자들의 급속한 유입으로 안산이 국제적인 다문화도시로서의 잠재력을 갖게 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안산은 이처럼 결코 단순한 일개 지방 도시일 수 없는 도시이다. 안산은 압축적 근대화의 성과와 문제점들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공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극복 혹은 해소의 잠재력과 가능성 역시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는 도시이다. 이런 면에서 안산은 안산지역주민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미래를 디자인하고 건설하는 데 반드시 참고해야만 하는 독보적인 의미를 갖는 도시이다. 아쉬움은 안산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안산시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대안적인 지방 자치, 실질적인 참여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안산 시민 사회 주체들 역시, 안산의 이러한 미래지향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성찰적 근대화의 '성찰'이라는 개념에 대한 논쟁적이며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는 성찰이 자기 적용에 해당하는 자기 반성을 뜻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 적용이란 근대화 자체가 근대화될 수 있어야 하며, 합리성 자체도 합리화될 수 있어야 하며, 민주주의 자체도 민주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를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행위가 추구하는 목표와 수단의 일관성, 혹은 형평성을 좀 더 철저하게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안산의 대안적인 사회 역량은 이제 압축적 근대화의 절정으로서 안산이 아니라 성찰적 근대화의 출발로서의 안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시선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제 만들어진 안산을 보던 관습에서 벗어나 만들어지고 있는 안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외부자의 시선이 아니라 내부자의 시선으로, 밖의 시선이 아니라 안의 시선으로 안산의 현실과 대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압축적 근대화의 막강한 전위대와 대항하는 과정에서 안산의 이름없는 민초들 스스로가 체득한,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적이며, 생태친화적인 작은 힘들의 진정한 위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전히 그 작은 힘들을 사물화시키고자 골몰하고 있는 낡은 권위들과 그 지지자들을 향한 정당한 비판도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자신의 믿고 누려왔던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 소속감, 권위 등을 부정해야만 하는 힘든 경험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최영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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