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손님과 점심식사를 하러 간 전원 식당 한 쪽에 그럴만한 숲길이 있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가 낙엽이 수북이 쌓인 그 길에 들어섰을 때도 아직 남은 나뭇잎들이 드문드문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금방 눈이라도 쏟아 질 듯 하늘은 흐리고 풀벌레들조차 다 더나간 호숫가에는 시든 풀들만 찬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우울 바이러스가 있다던데 이런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낙엽 길을 걷다가 나는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은행나무 밑이다. 옆에는 단풍나무도 있다. 그래서 은행잎과 단풍잎이 무수히 떨어져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낙엽과는 상관없이 아니 대조적으로 빛나는 존재들, 그것은 보리 싹처럼 생긴 풀이다. 그 빛깔이 어찌나 푸르디푸르던지, 그리고 어찌나 곱고 깨끗하던지 순식간에 나는 그 풀들의 팬이 되고 말았다.
때가 한 여름였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도 귀하게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억새처럼 키가 크고 힘이 강한 풀들도 다 시듦으로 활동을 멈춘 겨울에 독야청청 아직도 살아남아 그 고운 빛을 더 푸르게 발하고 있는 그들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들을 덮어 버리려고 그토록 많은 낙엽이 떨어졌건만 낙엽들에게 묻혀서도 그 작은 잎사귀들을 보란 듯이 하늘로 내밀고 뭔가 못다 한 말을 하려는 듯 하는 그들로 하여 숲에는 우울이 아닌 희망의 바이러스가 가득한 듯 했다.
밤이 아무리 어두워도 희망의 별은 뜨고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양지쪽 햇살은 있게 마련이다. 밤은 어두운 것이고 겨울은 추운 것이다. 어두우면 호롱불을 켜고 추우면 화로에 불을 담는 것이 희망적 지혜이다. 그리고 흐릿하지만 호롱불을 즐거워하고 재가 식어 미지근해도 질화로를 감사해 하는 곳이 행복이다. 이 말은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즐거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어려운 시국을 대처해 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텔레비전이고 신문이고 온통 부정적 사실들로 가득하다. 주가가 오르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더 큰 뉴스가 되기는 될 것이다. 사람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큰 뉴스가 되듯. 그러나 이럴 때 우리 국민이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뉴스가 희망적 메시지여야 하는 것은 다른 사안이겠지만 국민이 희망을 잃고 추풍낙엽처럼 추락하지 않기를 진정 원한다면 모든 매체들은 낙엽속의 풀잎 같은 희망적 생명의 메시지를 앞으로 끌어내는 보도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정치가들도 자꾸 희망을 말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정승들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자는 말이 아니다. 망하는 것이 불 보듯 뻔 하다 할지라도 이길 수 있다고 우리는 망하지 않는 다고, 이것이 이순신장군의 불멸의 전법 아니었을까.
요즘 불황 때문에 직장인들의 근무자세가 바뀌었다고 한다. 불황에 직장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며 철새 직장인들이 자기 직장에 감사하고 충성하는 텃새 직장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시장 분위기도 바뀌었다고 한다. 20원짜리 속옷이 팔리고 둘이서 음식 하나를 시켜 나눠 먹어도 민망해 하지 않는 다고 한다. 불황이 사람들을 제 자리로 돌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거품 속에 숨겨져 있던 사람들의 순수함이 살아나 탄탄해지고 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절망은 극단적 사고와 행동을 유발한다. 그러나 희망은 나눔과 사랑을 실천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낙엽속의 겨울 풀잎은 희망이며 생명이다. 이 희망과 생명은 어디에든 있다. 늘어 가는 ‘빈손 황혼’의 초라한 보금자리에도 있고 은행원 어머니의 ‘눈물편지’에도 있고 올해 지구촌을 덮을 것이라는 ‘불루크리스마스’에도 있다. 사람은 불황 때문에는 죽지 않는다. 다만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호롱불 하나면 지낼 수 있고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질화로 하나면 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불황이 아무리 깊어도 희망만 있으면 산다.
불황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우리는 열심히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희망을 말해야 할 때이다.
최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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