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을 껴안는 하늘이 있다.
너와 나의 객지(客地)를 덮으려고
여기까지 따라 온 고향 이런가
졸저<상록수역에 첫눈이 내리면>중에서
올해도 상록수역에 첫눈이 왔다. 십구 년 전 이곳에 살러 온 나를 반겨주던 전 바로 그 눈이다. 그동안 더욱 빈번해진 전동열차가 섰다간 가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탄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곳이 객지(客地)이다. 객지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 중 가장 불안한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상록수역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는 겨울 냄새가 난다. 이십 년 전에는 더욱 그랬다. 눈물을 참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처럼 금방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이 흐린 하늘. 해롭지는 않지만 스치면 베일 것 같은 냉혹한 바람, 유순하고 만만해 보이지만 속에 긴장의 칼을 숨기고 꽁꽁 언 고드름… 그런 겨울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손을 비비며 모여들고 흩어지던 당시의 상록수은 허허벌판에 지붕도 없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겨울이었고 또 하나의 객지였다. 거기 첫눈이 내린 것이다. 그것도 펑펑. 순식간에 도시가 하늘에 안기고 포근해지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객지는 없다. 첫눈은 너의 객지 나의 객지를 모두 덮고 하나 되게 하는 고향 정다운 그 눈이다. 눈은 언 마음을 녹인다. 눈은 울고 싶은 마음을 달랜다. 눈은 객지의 서러움과 외로움과 조책감을 덮어 준다. 첫눈은 객지까지 따라 온 고향이다.
이래저래 정붙이지 못하고 사는 마음을 덮고
저리도 펑펑 흰 눈이 쏟아지면
오늘따라 외롭지 않은 상록수역 개찰구를
구면(舊面)처럼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
어둡기 전에 사랑의 문등(門燈)을 켜겠네.
신도시가 대개 그렇지만 안산 역시 정붙이고 살기가 쉽지 않은 도시이다. 시름을 달래고 서 있을 강한 줄기 흐른 것도 아니고 수백년 밟고 다닌 정다운 골목길 하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좀 나아 졌지만 내차 없으면 다니기도 힘든 도시이고 마음 바븐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기만 하여 두런두런 사람 사귀기도 쉽지 않은 도시이다. 그러나 첫눈이 펑펑 쏟아지면 달라진다. 상록수역 개찰구를 나오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도 어디서 본 듯하여 말이 걸고 싶어진다. 덥숙 손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다. 첫눈의 힘은 놀라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의 짧은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진다 할지라도 그래서 밤바람이 말을 달린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음은 첫눈에 마음이 녹은 누군가가 나그네를 위하여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켜 놓은 문등이 있을 것임이기 때문이다. 그런 밤, 눈이 그치지 않고 쌓이기라도 한다면 밤도 전설처럼 깊어가지 않을까.
그 뉘도 모르는 산등성이를 돌아
산전수전(山戰水戰) 거쳐 온 노모(老母)같이
이제는 짐을 풀고 깊어가는 눈 밤(雪夜)이여
각골공원에도 사동포구에도 첫눈이 쌓이고 있다.
늙으신 어머니가 걸어 온 길은 멀기도 멀다. 산등성이를 돌아오듯 험하기도 하다. 어쩌면 첫눈도 그렇게 먼 길을 왔을 것이다. 그 눈이 쌓이는 밤 객지에서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내리는 눈을 보고 있을 아들들도 있고 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지상에 짐을 풀 듯 고단한 봇짐을 풀고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녹일 수 있다면 내일도 먼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나그네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눈 속에 묻히는 상록수역이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각골공원에도 사동포구에도 그리고 외롭고 고달픈 모든 이들이 잠든 지붕위에도 쌓인다. 풍성히 내려 쌓인 첫눈만큼 큰 정치와 경제와 문화가 또 있을까.
눈이 내리면
상록수역에 첫눈이 내리면
걸어가게 되겠지 눈이 되어 눈 속으로
눈 하늘에 안기는 나의 성읍, 본향으로
차가 아무리 빠르고 좋아도 차로만 모든 곳을 갈수는 없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집에 이르러 집안으로 가는 길,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 그 길이 없는 노숙자들도 있다. 그 길을 넘어서 가고 싶은 길, 그 길을 그리워하는 실향민(失鄕民)들도 있다. 그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행복을 주는 좋은 일이 첫눈처럼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최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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