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 동화작가 (안산화랑초등학교 교장)

꼭 45년 전 이맘때입니다. 중학교 입시제도가 있었던 때였습니다. 명문 중학교에 제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날은 봄비가 아침부터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제 운명이 송두리째 바꾸어진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제 운명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자, 이번 시간엔 시를 지어보겠다. 제목은 ‘봄비’ 잘 짓기 바란다.”

교실은 삽시간에 물음표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입시 공부만 죽어라 해오던 우리들이 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치품에 불과했으니까요.

창밖으로 봄비는 쉬지 않고 내리고, 목련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어떻게 시를 지었는지 기억에 가물가물할 뿐. 어떻게 써야 할지 고개만 갸웃갸웃, 멍하니 빗줄기만 바라보다 시간에 쫓겨 지은 낙서 같은 시. 생전 처음 지은 시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지었어!” 제 어깨를 두드려 주시곤 제가 지은 시 아래에 95점을 써주셨습니다. 제 어깨를 두드려 주시며 ‘잘 지었어!’라고 해주신 칭찬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낙서 같기만 한 시, 선생님은 제 가슴에 문학의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겨우 다섯 글자도 안 되는 칭찬에 제 인생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전 교사가 되고 동화작가가 되었습니다. 동화작가가 되어 선생님을 제일 먼저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봄비 내리던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그저 대견스러워 허허 웃으시는 그 모습, 세세한 이야길 들으시던 선생님은 갑자기 제 손을 꼭 잡으며 눈시울을 적시셨습니다.

“미안하다. 네가 작가가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95점을 주지 말고 100점을 주었어야 했다. 내가 잘못했다. 그 때, 100점을 주었더라면 넌 더 큰 작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제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시는 선생님, 전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나침반이고 등대였습니다.

선생님.

이제 곧 스승의날이 다가옵니다. 그날 선생님께 긴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받아보실 수 없는 편지이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마치 학교가 붕괴되는 것처럼 큰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왕따와 일진 폭력으로 학교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 연말, 한 중학생의 자살로 촉발된 학교폭력의 실상에 온 국민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지난 2일엔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는 복장 불량을 지적한 여교사를 여학생이 폭행, 실신시킨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학교의 교육을 총괄하고 있는 저도 충격의 늪에 빠졌습니다. 어떤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 아직까지도 가슴이 막막할 뿐입니다.

지난주,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2012 청소년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2010~2011년 설문 조사한 결과를 분석한 발표는 한 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15세~19세 사이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조사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위가 2년 연속 자살로 나왔습니다. 학교에서 스트레스 받는 학생 68.2%, 자살 충동을 느낀 청소년 8.8%, 담배 피우는 중고생 12.1%, 술 마시는 중고생 20.6%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학교의 자화상입니다. 꿈을 마음껏 펼치고 미래를 설계해야 할 학교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우리의 청소년은 미래를 짊어지고 갈, 세계를 이끌고 가야 할 소중한 꿈나무입니다. 그 꿈나무들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반듯하게 서야 합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학교가 모든 것을 다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학교와 가정과 지역사회가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학교가 반듯하게 설 수 있습니다.

서로 원수인 듯 으르렁거리는 보수와 진보의 교육이념도 합일점을 찾도록 서로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최고인 양 목소릴 높여도 기름과 물이 될 수 없는 것이 교육입니다. 독선과 아집 아래 합일점 못 찾는 교육현장에 선생님들은 힘들어합니다. 고장 난 신호등의 횡단보도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청소년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낭비해서는 안 될 소중한 시기입니다. 그 중요한 시기를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학교와 가정과 지역사회가 손잡는 날을 학수고대해 봅니다.

교실마다 선생님과 제자들이 만드는 웃음소리가 별이 되고 꽃이 되는 날을 그려봅니다. 선생님의 잊을 수 없는 칭찬 한 마디, 사랑 가득한 눈빛 하나로도 제자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학교를 그려봅니다.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류근원 동화작가 (안산화랑초등학교 교장)  kwroo@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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