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안산신문

김미희<소설가>

남편의 고향은 시댁이라고 하지 고향이라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산허리 감도는 구름 장막처럼 아련한 그리움이나, 친구들과 장난치고 말썽 부리던 미소가 베어 나오는 어릴 적 추억이 생각나기보다는 늘 막연한 부담이 먼저 나오게 마련이다.
  작년 가을 문학 답사로 선택한 곳이 남편의 고향인 충북 괴산이었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생가가 있는 괴산읍 동부리는 시댁을 갈 때마다 지나치는 곳이고, 쌍곡계곡, 우암 송시열의 주자학이 결실을 이루었던 화양계곡도 여름이면 한 번씩은 들러 쉬고 오는 곳이며 제월대 고석정 모두 가본 곳이다.
  망설이게 하는 일이 많았음에도 마음 맞는 문우들과 하는 여행이라 이른 아침 발을 재촉하여 나섰다. 너무나 낯익은 길을 따라 맨 먼저 도착한곳은 괴산읍내에 있는 홍명희의 생가였다.
  읍내에서 시댁과의 거리는 불과5킬로 정도로 전화만 하면 시부모님이 달려 나오실 것 같았다. 생가라고 해야 남의 소유인데다 최근에 확인되어 대문에 열쇠가 채워져 밖에서 지붕만 쳐다보고는 돌아서야 했다. 벽초의 생가는 중부지방의 대표적 건축양식인 정남향에 좌우 대칭의 평면을 가진 구조, 조선후기 사대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다는 학계의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낡은 집 주위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노란 잎마저 흔들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왜 여기에 왔나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한 집이다.
  제월대는 홍명희가 어릴 적 살던 곳이고 고석정은 홍명희가 즐겨 찾아 명상하던 곳이라고 했다. 고석정이 있는 제월리에 홍명희 문학비가 있는데 벽초의 문학비 건립은 괴산군 보훈단체로부터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벽초의 부친 홍범식은 조선말기 금산군수로 일하다 한일합방소식을 듣고 분연히 자결 했다고 한다. 또한 벽초도 1919년 3월 선친의 생가이기도 한 이곳에서 지역 선후배들과 함께 [괴산 만세운동]의 계획을 짰다고 한다. 그리고 투옥까지 되었다. 그런 그가 자진월북해서 북한의 부수상까지 지낸 전범자이니 고향사람들은 자랑스럽기도 치욕스럽기도 한 사람이다.
  5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젠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남북방문을 통해 화해를 하고 만나기도 하는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의 상처는 한이 되어 한국 근대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벽초의 문학작품만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의 사상과 행적은 아직까지도 역사에 묻혀지지 못했다.
홍명희 家는 양반 사대부 집안으로 집안에 전해져 내려온 필사본 후기에는 언문(한글)으로 베껴 쓴 이야기책이 남자로써는 수치스럽지만 노모를 위하여 쓴다라는 효심어린 대목이 있다. 노모의 눈에는 얼마나 사랑스럽고 재주 넘치는 아들이었을까? 그러나 민족 전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역 죄인을 면치 못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소설 <임꺽정>은 우리의 삶과 정신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여 궁중비화를 주로 소설화한 당대의 역사 소설이나 서구적 기법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소설들과는 달리, 진정한 우리문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 <임꺽정>이 지닌 문학적 가치는 문화 생산자로서 벽초가 보여준 자기 문화에 대한 이러한 애정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벽초의 문화정신은 개화기 이후 대다수 지식인들이 보여준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서구 지향적인 행태와는 분명히 다르다. 추종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지적인 오만함에 젖어 있던 문화행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소설 <임꺽정>을 통해 구현된 벽초의 그것은, 우리에게 자기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소수의 지적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문화적 욕구 충족을 위한 대중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남한에서는 문학적으로 북한에서는 사상적으로 성공한 인물로 이만큼 이름을 날린 사람도 드물다.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벽초 홍명희.
어느 누구든 고향에 돌아오면 포근하게 감싸주는 따뜻한 정서로 이제는 이념의 논쟁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인간의 한사람으로 벽초 홍명희를 대하고 싶다.
''우리는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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