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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를 향하여
  • 안산신문
  • 승인 2023.01.1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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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소설가>

문학은 창조다. 하지만 문학 자체가 저 홀로 가진 욕망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창조다. 문학이 미지의 세계를 창조하는 이유도, 미지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동경하는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다. 또한 행복하고 안정적인 세계만이 인간이 추구하는 유토피아는 아니다. 인간은 때로는 자발적으로 남루한 방랑자가 되어 불행의 쓴맛을 보기 위해, ‘기지의 세계’가 주는 안락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가 주는 고독을 찾는다. 인간은 ‘기이하고 낯선 상징의 세계’로 내동댕이쳐짐으로써 무한한 쾌락과 모험심을 만끽하며, 왕성한 창조의 동력을 얻는 마조히스트의 면모를 확실히 갖고 있다. 모름지기 창조의 인간은 파멸을 무릅쓰고 풍요로운 상징의 신세계로 가는 것이다.
허먼 멜빌(1819-1891)은 1819년 뉴욕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은행 급사에서 농부, 상점 점원, 측량사, 엔지니어, 초등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온갖 직업에 종사했지만 만족하지 못한 멜빌은 1837년 상선의 선실 급사로 선원 생활을 하였고, 곧이어 고래잡이배를 타고 희망봉과 태평양을 횡단했다. 5년에 이르는 바다 생활은 훗날 멜빌의 글쓰기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드넓은 대양은 멜빌에게 삶의 의미를 터득한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모비딕》의 줄거리는 피쿼드라는 고래잡이배에 승선, 태평양으로 고래잡이를 나갔다가 뱃사람들에게 모비딕이라 불리는 거대한 흰고래에 받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그것을 포획하고자 하는 광기 어린 집념에 사로잡힌 선장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동료 선원들이 사망한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이슈메일이라는 한 젊은이의 체험담이다.
《모비딕》이 창조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모비딕을 기어코 죽이고 말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다. 몇 년 전 고래잡이 항해에서 에이해브는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었다. 충분히 분노할 수 있다. 하지만, 상식을 존중하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말대로 ‘말 못 하는 짐승’에 불과한 모비딕을 ‘악마적 의지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모비딕 추적을 세계에 편재하는 악과의 투쟁으로까지 비약하는 에이해브의 광기는 한 쪽 다리를 잃은 데 대한 복수의 수위를 훨씬 넘은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해브가 생각하는 모비딕은 단지 ‘말 못 하는 짐승’이 아닌 고도의 상징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비딕은 과연 무엇인가?
바다는 숭고하고, 위대하며,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평온한 듯하면서도 순식간에 광포해지고, 강렬한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거울처럼 평면이었다가도 광풍과 폭우를 휘몰아 쳐댈 때는 하늘 끝까지 삼켜버릴 듯한 입체적 공간으로 변한다. 바다는 인간 존재 따위에 관심도 없는 비정한 자연 그 자체이기도 하다.
광활한 망망대해, 그 광막함은 이슈메일에게 존재의 무의미, 우주적 공허감을 절감케 한다. 작품의 결말에서 모든 존재들을 소용돌이 속으로 집어삼킨 바다는 이런 무한한 공허 그 자체다. 이렇게 바다는 ‘영원한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낯선 삶, 그리고 다양한 답이 어우러져 풍요로운 상징으로 가득 찬 세계는 문학의 원형적 고향이다. 물론 그 고향에, 일상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타향에 예고도 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일에 당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정답만이 강요되는 나른한 삶과 다양성이 무참히 뭉개지는 무상징의 세계에서 우리의 두뇌는 ‘창조’라는 위대한 신의 은총을 마음껏 누릴 수 없기에, 이 당혹스러움은 부정적인 정신 상태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저 바다를 동경하고 떠나지 못하는 일상에 굴복하는 자신을 한탄한다. 그 바다는 내 안에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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