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열린글밭 기고
[명사기고]호학(好學)과 사랑
  • 안산신문
  • 승인 2023.01.11 09:07
  • 댓글 0
서한석<경기테크노파크 전략사업본부장>

 위 두 단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담고 있는 총체적 의미는 다른 것 같다. 호고(好古)는 옛것을 좋아하고 호학(好學)은 학문을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좋아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사뭇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좋아한다는 즐긴다는 뜻과 비슷하다. 좋아하거나 즐긴다는 말은 자신한테 집중하는 감성이다. 대상에 대한 일체의 미련이 없는 상태이다. 이모저모를 선험적 혹은 영(靈)적이든 경험을 따져서 싫으면 그만이다. 원망이나 미워할 이유가 별로 없다. 자신이 좋아서 그러했을 뿐이기 때문에 쿨(cool)하기 쉽다. 반면에 사랑한다는 말은 욕구와 비슷한 말이다. 사랑의 결과가 나쁘면 원망이 생긴다. 그리고 밉다는 감정을 동시에 수반하게 된다. 그 사랑하는 상태는 대상으로부터 심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첫째 호(好)는 스스로 선택한 감정이며 좋아하는 대상의 상태나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거나 간섭받지 않는다.  독립적인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감정은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 많이 좌우되거나 흔들린다. 좋아한다는 것은 요산요수(樂山樂水)처럼 즐기거나 기뻐하는 감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애산애수(愛山愛水)라고 한다면 산과 물의 상태를 선택하게 된다. 저 산은 좋은데 이산은 나쁘다. 이물은 좋은데 저 물은 맘에 안든다는 비교 결정을 하는 과정을 밟게 된다는 의미이다. 흔히들 기독교의 사랑이 아가페로서 무조건적인 내리 사랑으로 인식한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로 시작하는 신약 말씀에 기인한다. 그러나 과연 사랑이란 현상이 무조건적이며 무보상성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감정에는 반대급부에 대한 욕구나 보상심리가 필연적으로 생기지 않을까? 가족관계에서 보면 부모의 자식 내리사랑은 끝까지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많다. 그것은 하늘이 부여한 천륜과 피를 나눈 관계라 가능하며 매우 특화된 감성이다. 하지만 사회관계와 종교관계에서 항상하며 지속적으로 돌아오는 보상이 없는 사랑이 유지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 신약의 사랑은 특별하지만 실현성은 매우 적은 것이 현실적이다. 물론 테레사 수녀님 같은 성자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매우 큰 희생을 수반하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실천하기는 버겁다. 그러므로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좋아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는 감성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에 익숙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역사를 좋아하면 공부와 지식의 습득은 물론 세상살이에 해박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를 사랑한다는 말은 매우 모호하다. 한국역사를 사랑한다고 할 때 한국 역사와 관련이 없는 외국인은 그럴 수 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면 한국 역사에서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분별하게 된다. 역사에 대해 좋아한다는 것은 가치관을 형성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주관적 감성에 의해 보다 객관적인 가치관 형성에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감정적이거나 피상적 인식에 머무를 가능성이 많다. 역사를 주관적이거나 편견을 가지고 해석하게 하는 환경을 사랑이란 감정이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 부작용을 좀 심하게 표현하면 맹목적인 좌우 대립을 생기게 한다. 사랑하므로 편견과 비교와 분별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든 전쟁의 근거로 일부 작용했다. 사랑과 미움, 욕망의 보상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세째 호학(好學)은 호고(好古)하지 않으면 성취하기 어렵다. 사람은 홀로 배워 일정한 성취를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스승과 선현(先賢)때문에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좋은 가르침을 받을수록 학문의 깊이와 폭이 커진다. 그래서 옛말에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한다고 했다. 오늘과 미래를 위해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다.고루한 권위적 복고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호학은 개인과 사회 성장의 필수적인 상태로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할수록 자신과 사회의 기여도는 상승한다. 그러므로 자주적 인격이 형성되고 인생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삶이 가진 의미를 스스로 충족하는 경지에 이르면 무엇도 별로 부럽지 않다. 
 고전 어디에도 애학(愛學)이란 말은 없다. 반면 호학(好學)이란 말을 자주 쓴다. 변화가 심하고 기복이 있는 감정 상태에 인간의 본성과 덕성을 확립하려는 학문을 맡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주체적 심화과정인 호학(好學)을 통해서 천명(天命)과 인도(人道)를 밝힐 수 있어서이다.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우리의 역사와 전통과 연관하여 사용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께서는 천지(天地)라는 음양론적 우주관을 확립하고 애(愛)보다 정(情)을 더 선호하였다. 그리고 정(情)을 바르게 해서 도(道)를 세우고 본성(本性)을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1970년대에 발견된 중국 장사지역의 유명한 기원전 3세기 마왕퇴 무덤에서 출토된 성자명출이란 문헌으로 확인된바 있다. 이 문헌(백서)에 도시근정(道始近情), 정시근성(情始近性)이란 말이 있다. 도(道)의 시작은 감정에 가깝고 정(情)의 시작은 본성에 가깝다는 말이다.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이기론 전체를 뒤엎는 논리라서 매우 센세이셔널한 발견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 논의는 별도로 하더라도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보고자 한다. 즉, 사랑이란 감정이 도(道)의 시작이라면 선현의 말씀대로 사랑안에는 정(情)의 정(正)인 덕성(德性)이 있어야 한다. 반면에 서구문명의 사랑이란 단어는 애착과 탐욕과 독선과 배척을 잉태한다. 원망과 미움의 샘물이다. 따라서 사랑이란 말의 역사와 담긴 의미를 잘 헤아려서 사용하면 좋을 듯 싶다. 사랑이란 단어를 무조건 흠결없는 지고지순한 단어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서양문명에 기초한 의미가 아니라 동양 선현들이 말씀한 정(情)에 기초한 사랑이란 의미로 쓰여야 할 말이다. 지금껏 써온 사랑이란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안산신문  ansansm.co.kr

<저작권자 © 안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산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