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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을 옮기며
  • 안산신문
  • 승인 2023.04.1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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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소설가>

새벽 숲에는 솔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왔다. 숲속을 헤치고 부모님에게 가고 있다. 아직은 풀이 키다리로 자라지 않았지만, 지난가을 이후 자란 마른 풀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윤이월이라 이장하기에는 적당한 시기이고 날씨도 맞춤이었다. 저만치 소나무 숲 아래에서 엄마 아버지가 손짓하는 것만 같다. 숨을 헐떡이며 나란히 누워 계시는 두 분의 묘소에 다다르니 사방이 고요하다. 적막을 깨는 건 어쩌다 지저귀는 새소리뿐. 친구처럼 다정했던 부모님 곁에 우리는 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 묘소도 이제는 세월이 흘러 봉분이 낮아져 있었다.
아버지는 일본 강점기에 태어나 고단했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 특히 6.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여하여 생사를 넘나들었던 일은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였다. 아버지는 퇴근하실 땐 꼭 과자를 사 오셨다. 먹는 것이 귀하고 어려웠던 그 시절에 날마다 퇴근길에 아버지 손에 들린 과자봉지를 기다렸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으나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은 한 번도 아버지가 사 준 과자를 먹은 적이 없었단다. 우리 삼 남매의 생일을 꼭 챙겨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옆집 친구의 어머니는 지금도 만나면 ‘너거 아버지처럼 다정한 분이 없었어.’라며 추억을 꺼내 신다.
부모님과의 다정한 추억과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면 같이 여행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미술관과 뮤지컬을 보여 드리고 싶다. 수영이나 골프도 함께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사의 일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두 분의 산소에 가지고 간 꽂과 북어와 술 한 잔을 올렸다.
“엄마, 아버지. 이곳에 모신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고, 앞으로 30년은 봉안당에 모셔서 편하게 찾아뵙기로 했어요. 고향이라도 여긴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못 오는데, 새로 가시는 집에는 더 자주 갈 수 있어요. 그곳은 옆에 많은 분이 계시니 이 숲속보다 친구가 많이 생길 거예요. 아, 그리고 더 자주 찾아뵐게요.”
인사말도 다 끝내기 전에 포크레인 굉음이 다가왔다. 동생과 조카들은 서둘러 절을 하고 동생만 남고 우리는 모두 산에서 내려왔다. 하루의 일정이 길었다. 묘소를 개장하고, 화장하여 봉안당에 안치하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는다. 우리는 미리 대구에서 가까운 포항 화장장에 예약했다. 대구의 화장장은 원하는 날에 예약을 할 수가 없었다.
대구에서 포항으로 가는 길은 벚꽃을 비롯한 개나리,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꽃구경을 가는지 도로엔 곳곳에서 차가 정체되었다. 벌써 벚꽃은 꽃눈을 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꽃을 보며 신나서 노래를 불렀다. ‘청춘’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이미 나의 청춘은 다 갔고 저 세상 가는 길도 멀지 않았다.
화장장은 분주했다. 주말이라 우리처럼 이장하느라 개장해서 화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긴 가까운 대구에서는 예약도 할 수 없었다. 별로 기다리지 않았는데 끝났다는 벨이 울렸다. 부모님을 담은 분골함을 안고 다시 차에 올랐다. 분골함이 뜨거웠다. 화장터의 화로에서 단숨에 태워진 내 부모님의 오래된 육신으로부터 따뜻한 신호를 받았다. 모두 다 가는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말으렴.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 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생사의 밤길은 길고 멀어라.
-법구경 중에서

생과 사는 정해진 일이라도 혈육과의 영원한 이별은 생각조차 서러웠는데, 모든 것을 정리했다는 홀가분함은 뭔가? 부모님의 이장은 살아 있는 나의 의무감을 들기 위함이었다. 부모님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마지막 지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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