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 동화작가 (안산화랑초등학교 교장)

어디 이뿐이랴? 화랑유원지의 유혹도 만만치 않다. 호수 위를 일렁이는 물안개와 마른 갈대들의 수런거림도 발길을 잡아끌고 있다. 유원지의 볕바른 밭길엔 벌써 쑥과 지칭개가 싱싱한 얼굴이다. 이런 저런 유혹으로 인해서 퇴근 무렵엔 꼭 화랑유원지 호수를 한 바퀴 돌아오곤 한다.

지난 토요일 화랑유원지를 한 바퀴 돌고 올 무렵, 학교 쪽 하늘 위로 매지구름들이 빠른 걸음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더니 교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화단 모퉁이 자투리땅의 비닐온상으로 가는 길, 비닐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들이 통통통 실로폰 소리로 변조되어 들린다.

일주일 전, 화단의 자투리땅에 간이 비닐온상을 만들어 꽃씨를 심었다.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백일홍, 사루비아 씨앗들의 꼼지락거리는 모습들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화단 예서제서 겨우내 잠들었던 씨앗들이 와와 소리 지르며 금방이라도 고무공처럼 튀어오를 것만 같다. 야생화와 우리 꽃이 만개한 사이사이에 아이들의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학교를 그리며 비닐온상을 뒤로 했다. 창밖엔 제법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한다. 운동장 곳곳에 물길이 생기고 나무들도 해묵은 먼지를 씻어내기 바쁘다.

‘이젠 널 봄비라고 불러도 괜찮겠지?’

보면 볼수록 내리는 비가 매력적이다. 흙 비린내를 폴폴 선물하더니 시간이 더할수록 비는 참 맛있게도 내린다. 벌써 한 시간째 비를 바라보며 퇴근을 못하고 있다. 내리는 비가 마치 낚시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땅 속에 잠자고 있는 씨앗들을 잡아 올리는 낚시 같아 피식 웃어버린다.

바람도 유리창을 살강살강 흔들어댄다. 유리창에 부딪쳐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이 많은 상념 속에 젖어들게 한다. 오늘 내리는 비로 산과 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겨우내 가슴 깊이 묻었던 초록빛 물감을 풀어놓기 위해 얼마나 가슴 설레며 좋아할까? 흙 속의 씨앗들은 눈을 뜨기 위해 얼마나 옹알거리며 꼼지락댈까? 키 작은 풀들은 뒤꿈치 들며 얼마나 고개를 빼 올리려 할까? 창 밖 산수유나무는 노란 꽃망울을 열고 싶어 얼마나 안달복달을 떨어댈까?

이 비가 그치면 성큼성큼 다가올 화사한 봄.

삼월이 지나면 아이들에게 교실에만 있지 말고 봄이 오는 길을 자주 걸어보게 해야겠다. 민들레꽃 노오란 자드락길도 좋고, 이름 모를 키 작은 풀꽃들과 눈맞춤하는 화랑유원지도 좋고…. 그래서 선생님들과 아이들에게 봄의 느낌표와 줄임표가 가슴에 켜켜이 쌓이도록 해야겠다. 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예쁜 귀, 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예쁜 코, 봄을 만질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손, 봄을 이야기하고 봄에 대한 사랑의 시를 낭송하는 예쁜 입, 그런 봄 같은 아름다운 아이들로 키워야겠다.

밤 이슥토록 내릴 봄비, 봄비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봄비 같은 사람들이 많이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봄비 같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봄비 바이러스를 많이 퍼뜨렸으면 좋겠다.

어려운 경제가 회생할 수 있도록 경제계를 희망으로 적실 봄비 같은 사람, 가동을 멈춘 공장들의 기계가 다시 살아 힘찬 몸짓을 하게 만드는 봄비 같은 사람, 청년 실업의 걱정을 단박에 씻어줄 봄비 같은 사람, 이웃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는 봄비 같은 사람들, 사회 구석구석을 사랑과 희망으로 흠뻑 적실 봄비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땅의 아버지들의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봄비 스친 산처럼 다시 싱싱해지고, 가계부를 적는 어머니의 한숨이 봄꽃처럼 활짝 펴올랐으면 좋겠다.

봄볕 좋은 날, 아이들의 시와 그림을 ‘봄비 바이러스’란 주제로 화단 곳곳에 전시를 해야겠다. 그래서 봄비 바이러스 시화전 초대장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참새 떼에게도, 학교 위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에게도, 그리고 교실 유리창을 두들기며 흘러가는 바람에게도 말이다.

류근원 동화작가 (안산화랑초등학교 교장)  kwroo@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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