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날,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전집 여섯권을 빌렸다. 그는 세습백작으로서 그의 문학은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다’로 일관되었고, 그 자신 부인이 폐결핵으로 죽은 후 일본 최초의 여기자와 열애하다가 부유층의 특구인 가마꾸라에 있는 자기 별장에서 함께 정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 사람들은 얼핏 흰색의 반대를 검은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빨간, 노란, 푸른색은 흰색과 같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흰색의 반대는 희지않은 색이라고 해야 옳다’는 주장이었다. 나도 공감이었다.
그런 그의 전집에 부인 마사고(正字) 여사의 일기초(日記抄)가 끼어 있었다. 20쪽도 채 안되는 분량, 따로 이름하여 마쯔무시(松蟲). 내용은 징그럽지 않다. 마사꼬는 18세에 결혼하여 28세에 아들만 셋 두고 요절했는데 생애를 통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일기초에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었다.
‘남편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와서 훗가이도(北海道) 농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신혼가정에 어느 날 저녁시간에 예고 없이 남편의 친구가 찾아왔다. 마침 집에 왔던 시누이가 익숙한 솜씨로 차려주는 다과류와 차주전자를 신혼초라 부끄러워 한꺼번에 들고 조심조심 걸었건만, 다다미의 약간 솟은 틈새에 버선코가 걸려 엎어지면서 머리로 램프(당시 삿뽀로렌 아직 전기가 없었음)를 들이받아 박살이 났다.
시누이가 재 빨리 다른 램프를 밝혀주어 흩어진 차 도구와 박살난 유리 조각들을 대충 치우고는 흠뻑 식은 땀을 흘리면서 남편의 불호령을 기다리는데, 남편은 인자한 목소리로 “다친 데가 없어서 다행이구려” 한 마디 뿐. 남편은 친구 앞에서의 낭패나 체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가 다치지나 않았나 오로지 그걸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친구가 그 파격에 놀라워하는 기색이었다나. 당시의 정경이 또렷이 따사로이 그려진다.
아리시마는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다’에서, 빼앗는다고 해서 축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물 물을 자꾸 퍼내야 새 물이 솟는 이치와 같다고 했다. 그는 그걸 몸소 실천했던 위인이다.
문득 ‘꽃잎이 진다고 향기가 없어지나요/ 세월이 흘러간다고 당신을 잊을 수 있나요’라는 요즈음의 유행가 가사를 새김질하게 한다.
그렇지만 신선한 지하수를 퍼올리려면 먼저 폼푸에 한 바가지 마중물을 부어야 함이 순서임을 잊어서는 안되리라. 살아오면서 이따금 이 원리를 곱씹게 되는 것은 매번 내가 마중물의 순서를 어기어 발생하는 반응에 찔끔 찔리는 데가 있어서다. 사실 사랑의 진면목은 무조건도 거창한 구호도 아니더라. 상대에 대한 배려와 비례하더라.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계산이며 이기주의의 또 다른 표현일 뿐, 감동을 수반하게 하진 못하더라. 감동이 수반될 때 희생은 즐거움이더라.
마사꼬가 실토한 생애를 통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서 우리는 그 진리를 읽는다. 큼직한 다이어반지를 선물받는 순간도 아니었고, 황홀한 분위기에서 섹스의 절정을 만끽한 순간도 아니었다.
불호령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뜻밖에 내려진 천사같은 인자한 구원의 그 목소리 “다친 데가 없어서 다행이구려”였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배려인 것이다.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진실인 거야. 건성으로 해선 언제나 돌아올 결과가 뻔해. 심은대로 거두게 되니까.
대한민국 초대 기획처장 원용석씨의 서독시찰기에 이런 대목이 기억난다.
세계적인 한 자동차제작 공장에서 있었던라는 이야기. 그해 이윤을 크게 올린 사장이 점심시간에 광장에 전종업원을 집합케 하고는 “이 모두가 여러분들의 성실한 근로 덕분이므로 임금 50%를 자진 인상하겠노라”고 선포했는데, 박수소리가 하나 없자 사장은 맥이 풀렸다.
조금 있다가 노동조합 대표 세 사람이 사장실에 나타나서는 “임금인상안을 수락하되 3년간 사장님께 예치하기로 했습니다. 사장님의 탁월하신 경영으로 더 큰 발전을 기대합니다. 대신 주차장을 넓혀 주십시오” 순간, 노와 사가 맞 잡은 손은 더 없이 뜨거웠다고.
내가 아리시마 다케오 문학에서 받은 감동이 내 문학에 뜨겁게 수혈되어 오늘에 이른 것은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난 그 넉넉한 ‘배려’라 하겠다. 서독의 노사관계 또한 걸핏하면 자행하는 결사투쟁을 사전에 신뢰하고 배려로 눈 녹이듯 삭이고 있음이 아닌가?
투쟁을 부추기는 문학엔 구토를 느낀다.
나이 팔순도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제사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은 것’으로 그쳐야 옳음을 깨닫다니, 마사꼬의 ‘松蟲’이 오늘따라 무진 귀엽구나.
나이 듦에 대한 보상일까?
/ 이기진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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